오슬로의 비겔란 조각공원, 노르웨이
노르웨이에 와서 비겔란 조각공원에 가 보지 않고 돌아가 버린 사람은 꼭 다시 갈 필요가 있다. 공원이 좋기로 유명하기는 런던과 파리가 좋다. 그러나 비겔란 공원은 그것들과는 다르다. 공원의 의미가 보건·미화·휴양·유락 이런 것에 있다면 거의 모든 점에서 완벽하고, 특히 미화면에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무엇보다 비겔란이 좋았던 것은, 구스타브 비겔란(Gustav Vigeland,1869∼1943)이라는 전무후무할 것이라는 이 노르웨이의 대조각가를 알게 된 나의 감격과 기쁨이다. 오슬로 시 서쪽에 있는 거대한 이 공원에서는 즐기고 휴식하고 산책하는 행위 이외에 '행복한 몽상'에의 초대를 받게 된다.
생면부지인 예술가 비겔란을 상상하면서 나는 그가 어떻게 이 백야의 땅에서 일생을 보냈을까, 오늘날과 같이 난방 장치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을 겨울 백설의 시간에 저 차디차고 무겁고 딱딱한 그 많은 돌덩이들과 어떻게 싸웠을까 하는 의문에 사로잡혔다.
'시지프'의 돌 나르기는 자기가 원하지 않으나 해야만 하는 벌로 지옥보다 더 괴로운 작업이라고 한다면, 비겔란의 돌은 스스로 원해서 하는 행복한 작업이라는 점이 다르다. 그들은 끝도 없는 시간에 돌과 더불어 존재했던 하나의 신화적 인물이며, 또 다른 하나는 지상에서 신화를 남긴 인물이라고 하겠다. 나는 바로 그가 살았던 삶의 현장에 와 있다. 그는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언어의 원동력을 이 조각공원에 남기고 갔다.
해변을 끼고 있는 오슬로, 한 국가의 수도라고 하지만 런던과 동경과 서울과는 다른 조용한 차분함이 있고 분위기 있는 여자처럼 특유의 품위가 있다. 시가지에서 약간 변방에 위치하고 있는 이 공원 뒤쪽에 차가 도착했을 때, 잔디가 잘 손질된 넓은 곳에서 한 중년 신사가 키가 쭉 빠지고 미끈하게 생긴 개 두 마리와 놀고 있었다. 한가하게 놀고 있다고 하기보다는 물건 날라오기, 뛰기 훈련을 시키고 있었다.
나는 원래 개를 무서워하고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벌써 개가 어슬렁거리는 공원에 별 매력을 못 느꼈고, 또 넓은 그곳을 샅샅이 걸어 다닐 생각이 없어서 서성거리고 있었을 때 저쪽 돌층층대 위의 큰 기념탑과 그 주변에 있는 조상(彫像)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 공원의 심장부 같다고 느껴졌다. 그 장소는 무엇인가 보여줄 것만 같아 나는 개들을 슬슬 피해 가면서 거길 올라가기로 했다. 만일 공원 뒤 호젓한 넓은 잔디밭에만 있다가 돌아갔으면 나는 얼마나 후회했을까.
알고 보니 바로 그 돌층대 위가 비겔란 작품의 옥외 전당이었다. 탄생에서 죽음까지 울고 웃는 인간들의 다양한 삶을 환기시키는 노력을 조각에 도전했던 대예술가의 혼이 거기 살아 있었다. 공원 중심부에 200개나 되는 전라(全裸)의 조상들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고 어린애, 여자, 남자, 홀로 혹은 더불어 서 있었다.
어떤 아이들은 두 손을 하늘로 쳐들고 뛰고 있는가 하면, 한 중년 남자는 깨져 버린 사랑을 괴로워하는 표정으로, 분수를 받치고 있는 남자들은 무엇을 궁리하고 있는 듯, 또 어떤 여자는 절망이 짙게 깔린 고독한 시선으로…, 마치 이 공원을 지나가는 산책자들에게 한 번쯤은 인간의 삶이란 것에 철학해 보라고 권유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하는, 우뚝 솟은 흰 기념탑 (Monolithe)은 정말 볼만했다. 멀리서 볼 때는 큰 돌기둥에다 무엇을 새겨 놓은 것 같았으나 막상 가까이 가 보고는 모두 입을 벌리고 놀라는 표정이다. 121명의 인간을 조각해 놓았는데 마치 퍼즐처럼 사람의 형상이 눕고, 기대고, 껴안고, 떠받치고, 밀고 하는 동작들이 서로 연결 내지 엉켜서 조각되어 있는 흰 돌덩어리다. 놀라운 구성이었다.
조각의 도시 아테네나 로마에도 이런 것은 없었다. 손끝으로만 돌을 비비고 주무른 것이 아니라 수학적인 계산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 같았다. 층대 위에 있는 흰 조상들과 지면에 있는 검은색의 조상들로 나누어져 있고, 모두가 옷을 벗고 있었던 공통점이 있었다.
우뚝 솟은 인간 기념비 앞에 서서 공원 사방을 둘러보고 있으면 묘하게 스며 오는 감상에 젖게 되기도 한다. 마치 비겔란이 자기와 가까운 사람 같기도 하고, 그의 재능은 곧 '인간의 우월성'을 대표하는 것 같기도 하다. 동시에 그의 우월성과 나의 열등성은 묘하게 교체되면서 밤낮의 차이만큼 더 뚜렷하게 솟아나서 괴로움도 당하게 되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돌층대 위에서 공원 정문을 바라보았다. 빛이 강하지 않지만 여름에 만발하게 피어 있는 희고 붉은 꽃들, 2, 3백 년은 되었을 거목들, 거의 정문에 이르기까지 돌 난간에 도열해 있는 검은 조상들, 그리고 거기서 만난 실 같은 미소를 지었던 한 소년을 내내 잊을 수 없어 마음 깊은 곳에 새겨 놓았다.
나는 오래전 우연히 신문지상에서 "조각가 문 신(文 信)씨 조각 공원 기증, 시가 수십억 원 작품 3백여 점과 함께"라는 제목을 보고 단숨에 그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그 기사 내용은 거의 비겔란이 1921년에 자기의 많은 작품을 오슬로 시에 기증하여 이 공원에 건재하도록 한 것과 같은 문(文) 예술가의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문 신(1923 ~ 1995) 씨는 20여 년 동안 프랑스에서 열심히 쉬지 않고 작품 활동을 한 작가이며, 고향 마산에 평생의 꿈이었던 조각 공원을 위해 대표작 <하늘을 향하여> 와 조각 도자기, 유화, 수채화, 데생 3백여 점을 기증한다고 씌어있었다. 정말 훌륭한 정신이며 내가 알기로는 우리나라 예술가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 아닌가 싶었다.
나는 깊은 감사와 존경을 표하고 싶었고, 또 그분의 높은 정신이 널리 퍼져 이 같은 예술가들이 더 많이 탄생되기를 기원했다. 우리 사회는 그를 아끼고 보배롭게 대해야 할 것은 물론이고 그의 작품들이 영원히 빛나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배려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겔란이 오슬로 시에 작품을 기증할 때 더 계속해서 일할 수 있는 아틀리에와 자기가 살 수 있는 집과 몇몇 조수를 그에게 주었지만, 현재 그것마저도 공원 남쪽 비겔란 박물관이란 이름을 달고 수천 개의 조각, 데생들이 진열되어 이미 영면에 든 이 예술가를 이해하고 조각 예술의 문제성을 연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공부하는 교실이 되고 있다.
명화가 걸린 전람회장에서 나오는 기분은 항상 감미로웠고, 여러 감상이 스쳐 지나가지만, 조각 전시를 보고 나올 때마다 나는 묘한 철학적인 사고에 빠진다. 때로는 삶의 가치관의 혼란에서 헤매어 보기도 한다.
2023.02.26 - [유럽] - 뭉크 미술관, 노르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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