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4개국 종단 캠핑 기행 (프랑스, 독일, 스위스, 이태리)
프랑스에 체류한 지 수년째 되던 어느 초여름 유월이었다. 유월에 들어서면 온 유럽은 대 이동 (移動)의 계절을 맞게 된다. 너 나할 것 없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큰 슈퍼마켓 앞 광장에는 야영 텐트가 크고 작은 것으로부터 형형색색으로 즐비하게 전시되고 옥내 (屋內)에도 바캉스 도구들로 꽉 차 있다. 슈퍼마켓 내 가끔 무더기로 물건을 재어놓고 세일 선전문이 대문짝만 하게 붙어 있었고 한국산 제품도 가끔 눈에 띄었다.
우리가 남불 엑스에서 이동하여 노숙을 같이 할 식구는 네 명이었다. 5인용 텐트하나와 한국산 운동화 한 켤레를 샀다. 난생처음으로 떠나는 야영 생활이라 별의별 걱정을 다 하고 있었다. 나중에 생각하니 우습기도 하고 무지(無知)한 사람의 소심증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의 여정은 일단 파리로 가서 서울에서 도착할 S를 만나서 프랑스 동부 낭시, 스트라스부르크를 보고 바덴바덴, 하이델베르그, 뮌헨, 스위스 다시 이태리로 내려가서 제노바, 로마, 나폴리까지 가기로 되어 있었다. 처음 파리에 온 S를 위해서 파리에서 열흘을 바캉스 떠난 프랑스 사람집을 빌려서 머물다가 우리는 동부로 뻗은 도로를 끝없이 달려서 하이델베르그에 도착했다.
시내에 들어서자마자 느낀 인상은 고색창연한 해묵은 도시라는 내 상상을 실망시킬 뻔한 거리의 모습이었다. 공사판이었다. 더웠던 그날, 땅은 입을 딱 벌리고 여기저기 흙이 벌렁 뒤집혀 있었고 기중기가 세워져 있었으며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더 후덥지근하게 덥게 만들었다. 우리는 열심히 미슐랭 (프랑스판 관광안내서)을 읽으면서 중요한 곳을 대강 방문하고서야 역시 넥카강이 유유히 흐르는 하이델베르그는 유행이나 매력 쪽보다는 분위기 있는 품위 쪽의 도시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교(新敎)의 온상지였고 대학으로 널리 알려진 도시답게 "철학자의 길"이라든지 요란하지 않은 주점들, 이런 것이 호감이 간다. 야영 생활을 하겠다고 빈틈없이 준비해 온 우리들이라도 이도시에서는 야영이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금방 눈치챘다. 넥카강이 발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수수한 호텔방에 짐을 푸는 것이 현명하다고 여겼다.
강을 따라 내려오면서 내가 알 만한 시인이나 작가들이 아름다운 하이델베르그와 인연을 가졌다는 흔적이 없어서 좀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역시 감성(感性) 쪽이고 영혼 쪽인 시인 릴케가, 하이네가, 헷세가 이 “두뇌"와 이론의 도시에 취하고 매력을 느낄 수 없었음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온몸으로 시를 쓰려고 했던 자들이라면 넥카물 위에 얼굴을 비추며 나르시스적인 사색을 하며 정돈된 대학교정에서 책을 읽는다든가 논쟁을 하는 것보다는 아마 릴케는 룩상부르그 공원에서 멍청하게 시간을 보내거나 아니면 로댕 같은 대가(大家)와 주거니 받거니 하기를 더 원했을 것 같다.
본의 아닌 망명을 했던 하이네 쯤은 독일 교회의 윤리적 사회적 인습에 숨이 막혀 파리의 이 골목 저 골목을 헤매었을 것이고, 헷세는 "우리 방랑객들은 사랑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기에 그것을 가슴에 고이 간직하고 지내는데 익숙해졌으며 원래는 여자에게 돌아가야 할 사랑을 장난이나 하듯 마을과 산에, 호수와 늪에, 노방의 아이들이나 다리 난간의 걸인에게 초원의 소나 새나 나비에게 나누어 준다." 이런 글귀를 쓰면서 스위스 산과 들을 헤매었음이 당연했을 거다.
역시 하이델베르크는 시(詩)가 탄생하기에는 너무 질서 정연하고 장중한 아름다움이 서려 있다. 다리(橋)를 천천히 건너 가면 강을 따라 긴 길이 나오고 옆에는 초목이 우거진 언덕배기에 예쁜 그림 같은 집들이 드문드문 서 있다. 그 길만 따라가면 내가 잘 알고 있는 어느 목사님 댁이 나타날 것 같다. 그리고 나의 유년 주일학교 시절 노아의 방주에 대한 성경 얘기를 해 주시던 서양(西洋) 머리를 한 선생님의 음성이 들릴 것 같은 이상한 그리움이 몰려왔다.
히틀러가 전쟁 준비 때 도로를 일찍이 완성해 두어 본전을 다 뽑았는지 고속도로가 돈을 달라고 손을 내밀지 않아서 좋았다. 무료 통행이었다. 그리고 프랑스나 이태리도로에서 보던 찌그러지고 긁히고 한 작은 서민차들이 눈에 잘 뜨이지 않았는데 혹시 그런 차를 만나면 그것은 영락없이 죽을지 살지 모르고 달리는 프랑스와 이태리 번호판을 단 차들이었다. 독일 고속도로 위에서 만나는 차 열대 중 예닐곱 대는 편안하고 안전해 보이는 벤츠 아니면 BMW 등 자국차(車)들이다.
이 번에 도시보다 농촌이 훨씬 더 깨끗하고 예쁜 스위스의 농촌을 골고루 본 것은 큰 즐거움이었다. 쥬네브에 도착해서 하룻밤을 자기로 했는데 때가 때이니 만큼 호텔은 모두 만원이었고 겨우 있는 방은 값이 너무 비싸 우리는 생각을 바꾸어 약 한 시간 드라이브로 프랑스서 땅에 가서 자고 이튿날 아침에 다시 쥬네브에 들어오는 것이 현명했다. 프랑스에 와서 비슷한 수준의 방 값을 보니 쥬네브 것이 세배나 비싼데 놀랬다.
스위스에서도 우리 야영 도구가 별쓸모가 없었으나 여름이면 불(火)의 하늘을 가진 이태리 국경을 넘으면서부터 우리의 본격적인 캠핑을 시작할 수가 있었다. 도시마다 해변마다 캠핑장이 없는 곳이 없다. 우선 한국사람으로서는 캠핑이라고 하면 나이가 든 사람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생활이다. 젊은 아이들이 가끔 해 보는 정도로 알고 있다.
지중해 연안은 그렇지가 않다. 아무 데나 텐트 치고 자는 것이 허락되어 있지 않은 여기에서는 반드시 기업체나 개인 혹은 그 지역사회가 만든 지정된 장소에서만 텐트를 칠 수 있고 요금을 내며 모든 부대시설이 다 있다. 전기 전화 수도 샤워 혹은 수영장까지도 있는 데가 있어 편리하며, 카페도 있다. 참 마음 편한 일은 전혀 계층이 없다. 남녀노소, 부자, 가난한 사람, 북구인, 동양인, 흑인 모든 종족이 어울리는 장소다. 싸구려 일인용 텐트로 시작해서 고급 캬라반까지 진을 치고 있어 볼 만하다.
텐트생활에 익숙해질 즈음에는 우리들은 밤이면 하늘을 지붕 삼아 임시방을 만들고 아침이면 버너에 커피를 끓이고 마음에 드는 해변에 이르면 조개도 잡고 멱도감고 그야말로 속속들이 즐겼다. 또 오늘은 영어 하는, 내일은 불어, 모레는 스페인어 하는 이웃들을 사귀고 낮에는 같이 관광도 하며 피곤하지 않은 밤이면 같이 어울려 디스코테크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록도 왈츠도 추었다. “토요일밤의 열기"란 영화에서 처럼 일상에 지친 마음과 몸을 풀었다.
카프리나 쏘렌토에서는 지형의 굴곡이 너무 심해 텐트 치기에 어려움도 있었으나 내다 보이는 바다와 순풍(順風)으로, 이웃과 웃으며 얼굴을 맞대고 인사하고 지내나, 언제나 "빈 것"을 잘 느껴야 했던 도시생활의 허탈감 같은 것과는 달리 무엇이 충만해 오는 것 같고 누구에게 주고 싶으며 쏟아보고 싶은 정열을 느끼게 된다. 큰 도시에서의 삶이란 것이 흔히 양과 외형 (外形)에 의해 가치의 척도가 되었던 것이 자연에 접하면서 곧 질과 내면의 탐색을 하고 있는 자신을 만나게 되므로 스스로 제대로 된 사람냄새를 물신물신 느끼게 된다.
어느 날은 길을 가다가 아주 늦게 동네에 도착하여 거의 자정이 되어서 텐트를 치게 되었다. 밤이 너무 늦었고 우리는 피곤하여 그대로 지쳐 쓰러져 잤으니 지도에서 이름만 봤을 뿐인 거기가 어떤 곳인지 둘러보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뜨고 텐트밖으로 나갔더니 놀랍게도 주위에 여기저기 참외가 널려 있지 않았겠는가. 눈을 비비고 다시 주위를 훑어봤더니 거기가 바로 참외밭이었고 캠핑장을 확장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날은 오랜만에 느긋하게 놀면서 참외 "사냥"을 해서 바구니마다 담고 개울에 담가놓고 실컷 먹었다. 도시생활 소위 문화적인 데만 저려져 있던 우리는 금방 순진해지는 기쁨을 가졌고 마음도 이미 착해져 있는 것 같은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목마른 자에게 생수(生水) 같은 영혼의 기쁨이랄까 나폴리 해변을 끼고 쏘렌토로 달리고 있으면 한국인에게는 어느새 동해안의 물색과 바람이 몰려와서 한국의 산수(山水) 임을 착각해야 할 것이다. 옆 동네인 폼페이에 갔을 때는 그 주위에 진을 치고 있는 기념품 장사꾼들도 더위에 헉헉거리다가 시들시들한 채소 같은 표정으로 물건을 팔고 있었을 때다.
그러나 이미 폐허가 된 이곳에 들어가면 과거를 먹고사는 살아있는 어떤 생생한 혼(魂)을 만나게 된다. 사륜마차도 달렸다는 포석으로 덮인 도로, 베스비오스 화산이 폭발되던 날, 순식간에 지옥에 떨어진 최후의 고통스럽던 인간의 표정이 화석화(化石化)된 시체, 벽화에 나타난 인간의 육체를 두고 하는 향락은 오늘날 "엠마뉴엘" 춘화영화를 방불케 했으나 아름답고 선정(情)적인 그 여자들과 남자들도 별수 없이 백골이 되어 뒹굴고 있었다.
사자(死者)의 뼈가 누워있는 고도(古都)의 먼지 위를 걸어 다니다가 돌 틈틈이 이름 모를 풀과 작은 꽃을 만나면 내가 살아 움직이는 인간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며 죽음의 냄새 같은 것에 한순간 짓눌렸던 것 같은 생자(生者)의 자기를 느끼게 된다. “죽음에 대한 나의 공포는 생에 대한 선망과의 연결이었음을 나는 깨닫는다.... 나는 질투한다. 에고이스트가 아니기 위해서는 너무나 나는 생을 사랑하고 있었으니까."
저녁때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검은 하늘아래 천막을 치고 누웠으나 낮에 본 폐허의 유령들이 몰려와서 내 옆에 누워 있는 것 같아 처음으로 무서운 밤을 가졌다. 아마 아늑한 일류호텔 방에 누워 있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자다가 몇 번이나 눈을 뜨고 텐트 문이 잘 닫혔는지 확인했다.
그날 밤은 지중해 연안을 누비듯이 돌고 돌았다는 바울 사도까지 나타나서 "나도 이런 곳에서 수 없는 밤을 양가죽을 덮어쓰고 노숙했노라”하는 것 같았고 "당신은 복음을 업고 여기 하늘빛과 물에 홀딱 반해서 혹시 나들이를 즐기신 것 아니세요”하고 나는 세속적인 말로 묻고 있었다.
거의 한 달 반 동안을 중년여자가 노숙 (露宿)했다면 한국에서는 의아하게 생각할 일이지만 여기 지중해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멋진 바캉스를 보낸 셈이 된다. 세계에서 캠핑이 가장 적합한 지역은 역시 지중해 연안임을 알게 되었고 아마 나는 내 일생을 두고두고 남을 즐거운 시간임을 확신한다.
노천극장 나들이, 노숙 생활, 이런 종류의 것은 열린 공간만이 가지는 낭만이고 행복이다. 행복이란 언제나 노출되기만 하면 빛바래기 쉽고 질투를 받을 위험이 따르지만 그래도 해볼 만한 것이다. 프로방스를 향하는 내 발길을 굳이 만류하는 카프리의 흰 물살을 뒤로하고 서서히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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