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의 자연주의자들 (2)
드디어 기가 막히게 어려웠던 그 오후 한나절이 끝나고 바다 한쪽이 짙어지기 시작하였다. 뉴욕에서 오랫동안 계속했다는 수십 명의 나체들이 무대 위에서 "오! 칼캇타”의 공연을 끝내고 막이 내린 뒤돌아서는 나체 무용수들과 관객들의 기분도 이와 같은 것이었을까. 확실히 막이 내린 셈이다.
그때 밤의 고요는 물결 위에 어떤 무게가 되어 깔리고 멀리 범선들의 불빛, 하늘의 별과 더불어 종교적인 침묵과는 다른 감미로움과 우수가 드리워져 있었다. 나는 지칠 대로 지쳐서 절벽 위에 세워진 식당 뽀낭 (Ponant) 테라스에 앉았을 때는 정신과 배가 다 고파 있었다.
도라가 시켰던 생선요리를 어떻게 먹었는지 모르겠다. 뽀낭의 위치는 밤이라 똑똑히 볼 수 없었으나 틀림없이 절경이라고 생각되었다. 절벽 저 아래는 귀를 기울이면 파도가 가슴을 토하는 소리가 이따금 들리고 있었으니까. 먹으며, 마시며, 얘기하기 좋아하는 불란서 사람들과 식탁에 같이 앉을 때는 상당한 인내를 각오해야 한다. 식사시간이란 것이 두 시간도 좋고 세 시간도 좋으니, 특히 휴가기간 동안일 때야 말할 것도 없다.
거기다가 그날은 나는 피곤을 몹시 느끼고 있었다. 생활의 리듬이나 습관이 바뀌면 나이 들수록 쉽게 피곤을 느낀다는 어느 선배의 말이 그날처럼 절실했을까. 그러나 어차피 이 섬에 끼어들어온 바에야 기자가 탐방이라도 하는 것처럼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고 그들을 이해해 보는 노력을 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식당과 까페 테라스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 섬에는 경찰이 한 두 명 있지만 전혀 불상사나 풍기 문제가 없기 때문에 거의 있는 둥 마는 둥 상징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며 나이 분포는 젊음부터 노년까지며 국가 별은 불, 영, 독, 스칸디나비아 순서라고 한다. 특히 거기 온 사람들의 동기가 모두 흥미로웠다. 내가 처음 만난 빠리에서 내려온 오십 대 한 여인은 자기 아들이 여름마다 이 섬에서 휴가를 즐겼는데 오 년 전에 사고로 죽었으며 그 이후 아들 생각만 나면 이 섬엘 왔고 그러다가 자기도 해마다 여름이면 여기서 휴가를 지낸다고 했다.
또 이차대전 때 해군 장교로 근무할 때 유럽에 왔다가 우연히 근무 중에 이 섬을 알게 되어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그리고 결혼을 한 후에도 여름휴가마다 가족과 더불어 여기 와서 지내기를 이십구 년째하고 있다는 윌리엄 제독가족, 또 피터라고 부르는 영국 남자의 사연은 정말 이성과 너무 잘 어울러서 십구 세기 어느 소설의 주인공 같기도 했다.
그날 저녁 뽀낭의 테라스에는 희미한 가스 등이 벽기둥마다 붙어 있었다. (이 섬에는 전기, 식수 부족난이 있다고 했음) 이윽고 아다지오에서 알레그로의 리듬으로 대화가 오고 가다가 꿈으로 배부르고 있는 듯한 피터가 입을 열기 시작하면서 뽀낭의 밤의 절정을 이루었다.
피터는 런던에서 근무하는 47세 되는 총각으로 사는 은행원이었다. 17살 때 의사가 덧니를 뽑았는데 뿌리가 조금 덜 뽑힌 것이 원인이 되어 이상하게 몸이 찌뿌둥하고 손발에 마비가 오고 고통을 당하던 신체장해자 신세가 되어 있을 때 여러 의사를 찾았으나 그 위치가 아주 수술하기 힘들고 위험성이 많아 의사마다 수술을 거부했다고 한다.
그러기를 이십 년 되던 해 어느 훌륭한 의사가 수술을 쾌히 승낙하여 싸인을 하고 수술대에 올랐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기적 같이 건강의 정상을 되찾았고 인생의 새로운 설계로 부풀어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시작한 운동이 테니스였고 시간만 있으면 테니스장에 살 정도로 또 잃었던 청춘을 만회라도 하는 기분으로 일 년쯤 열심히 테니스를 했는데 이번에는 실없이 척추를 다쳐 다시 신체불구가 되어 병원신세를 지면서 절망 속을 헤매었다는 것이다.
어느 의사의 권유로 햇별이 좋은 지중해에 요양을 가라고 해서 온 곳이 영국사람들이 좋아해서 “나이스”를 연발하는 통에 불란서 발음으로 "니스"로 명명되었다는 그곳으로 왔다는 것이다. 거기서 어느 날 금발머리가 치렁치렁한 열여덟 살 된 이태리 말을 하는 처녀를 만나 첫눈에 반하게 돼 “로마의 휴일"의 오드리 헵번과 그레고리펙처럼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해변을 걸었다고 했다.
그때 나이 38이었는데 그 아가씨가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에게 너무 과분하고 당치도 않다는 것을 알았고 자기가 이미 불구라는 죄의식 때문에 사랑의 고백은커녕 가슴 쓰리게 헤어졌다는 것이다. 자기 방에 돌아온 피터는 그날 밤 하얗게 뜬 눈으로 새고 그 아가씨의 다음 여정이 H섬이라는 것만을 막연하게 기억하고 무작정 배를 타고 온 섬을 뒤졌으나 "섬 속의 공주"를 결코 찾지 못한 채 실의와 허탈감에 사로잡혀 런던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그 해부터 9년째 혹씨 그 사랑스럽던 피렌체에서 온 아가씨를 만날 수 있을까 하고 해마다 여름이면은 그곳을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식당프로미, 뽀낭, 까페 이곳 주민들은 모두 피터의 사연을 알고 있는 눈치다. 피터는 그녀만 만나면 사랑을 할 준비가 다 되어 있는 셈이다.
그동안 익혀둔 이태리말 실력은 사랑을 주고받기에 손색없다는 주위의 뒷얘기다. 그의 환상적인 내면 생활과는 달리 신체불구의 조건에서도 가장 현실적인 현장인 은행이라는 곳에서 돈을 세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묘한 삶의 흑백 관계로 보였다. 나는 그날 밤 거기 오는 사람들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은 셈이다.
그들은 어느 모로 보나 대부분 정상적이고 상당한 교육배경이 갖추어진 각양각종의 인간들의 모임이라는 것을 내 눈으로 확인했다. 하기야 일본이나 한국 공동 목욕탕에 가서 우리가 목욕할 때 뭐가 이상했던가. 이들에게는 우리들의 것과 별 다름없는 장소인 것 같다. 우리들 공동 목욕탕이란 목사님, 생선장수, 교수, 이발사, 변호사, 수위... 각종 사회계층의 사람들이 다 가는 곳이다.
그 속에서는 적어도 계급이 없다. 귀천이 없다. 나와 똑같은 육체를 가진 다른 사람과 더불어 그 공간을 이용할 뿐이다. 목욕탕 속에서 옆집 아주머니 허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목사님 아랫도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관찰하지 않는다. 누구도 그런 흥미를 갖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옷이라는 것, 몸을 가린다는 것이 얼마나 더 선정적인가를 알게 된다. 비키니를 입은 여성을 남자들은 호기심스럽게 바라본다. 미니를 걸친 다리를 슬쩍슬쩍 거리에서 처다 본다. 유행의 첨단을 따라 만들어진 아름다운 옷을 입고 거리에 나가보라. 얼마나 많은 시선이 던져지는가.
그러고 보면 벗는 쪽보다 입는 쪽이 더 유혹적이란 말도 성립된다. 이것은 물론 나의 역설적인 논리성에 지나지 않지만 전혀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닌 듯하다. 세계는 언제나 이중성의 해석이 가능하듯이 모든 취향이 모든 색갈이, 모든 형태가 공존 가능한 곳에 바람직한 삶이 있지 않을까. 이 섬의 여름 축제는 바로 유럽 노천문화에 빼놓을 수 없는 한 얼굴이기도 하다.
아직 불란서에서도 일반 대중에게 크게 환영받는 편에 서지 않는 자연(나체) 주의자들의 공통점은 우선 태양이 여린 지역 사람들이 건강을 위해서 몸을 태우고자 하는 뜻과 또 사회란 이름으로 강요되는 좀스러운 도덕률 위선, 옷이 만드는 차별의식에 대한 무의식적인 저항의 몸짓으로 분석되며, 개인의 행복이란 회의나 기도, 극기를 통해서라든지 가령 예를 들면 유엔 본부나 군대, 교회 같은 집단들과는 거리가 멀다고 믿는 사람들 같다.
그렇다고 무정부 주위자들이 아닌 것임은 각자 짐 꾸러미 속에는 여권이라는 것을 대단히 중요하게 다루면서 저마다 자기가 소속되어 있는 국가를, 대통령을, 얘기하고 있다. 단지 자기 편할 대로, 자기 좋을 대로,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과 환경과 더불어 살겠다는 의지의 인간을 보게 된다.
백 년 혹은 이백 년 후, 세계 해변을 상상해 보면서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다음날 오후 육지로 나오는 배를 타고 생리에 맞지 않는 난류에 못 견디고 한류를 찾아 떠나야 하는 한 마리 물고기가 나는 되어 버렸다. 수영복을 입고 물속에 들어갈 수 있는 내 사랑인 섬 뽀끄롤에서 도라와 엘렌이 일이 끝나는 데로 거기서 합류하기로 약속하고 부두에 따라 나온 그들에게 손을 흔들며 멋쩍게 웃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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