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도시 옥스퍼드와 캠브리지
뭐니 뭐니 해도 내가 겨냥한 장소는 옥스퍼드와 캠브리지, 대학 도시들이다. 얼른 보고 싶었다. 어느 영화에서 보던 것과 같이 지금도 대학을 둘러싸고 있는 수로(水路)에서 보트경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런던시에서 서북쪽으로 한 시간쯤 달려 옥스퍼드 시에 이르기 전에 시골 풍경 속에 있는 조그마한 교회 앞에서 내렸다. 처칠 경이 이 교회의 뒷마당에 누워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나는 정치를 모르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살아생전에 평화를 위해서 일했다는 것과 그림을 그렸고 글을 썼다는 것만으로 늘 나는 호감을 가졌다.
호감이니 사랑이니 우정이니 하는 것들은 곰곰이 생각하면 언제나 엉뚱한 동기에서 아주 조그마한 몸짓, 언어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A는 "안녕하십니까?", B는 "안녕하세요?"와 같은 어미변화, 목소리의 톤, 어와 아가 갖는 뉘앙스에서 시작해서 A는 호감이 가고, B는 싫다로도 되니 이 얼마나 인간은 간지럽도록 예민하고 그 결과는 섬찟하도록 다를 수 있으니 누구의 탓인지 모르겠다.
묘지는 양지바른 쪽에 그 큰 이름값과는 달리 보기 좋을 정도로 소박함이 있었다. 반대로 스페인을 종신 통치했던 프랑코의 무덤 같은데서는 그대로 그의 세속적인 욕심이 드러나고 있었던 기억이 있다. 자기 무덤을 위해서 생전에 그 거창한 교회를 짓게 했는지 교회를 짓다가 우연한 발상으로 자기 누울 자리 을 만든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어쨌든 평풍이 둘러싸진 것 같은 절경을 배후로 그가 점잖은 총통답게 마드리드 근교에 꽃에 쌓여 누워 계셨음을 보았기 때문에 처칠경의 것은 한 인간의 무덤 같아 호감이 갔다.
경주에 있는 왕릉들이나 이집트의 피라밑 같은 것도 따지고 보면 그 나름으로 세속적으로 욕심 많은 왕족들의 본성(本性)을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죽어서까지 일등 하겠다고 세워진 제왕(諸王)들의 거창한 무덤을 보고 있으면 시간의 영원성(永遠性) 앞에 기어코 굴복하고만 인간들의 서글픈 표본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유아독존, 일등 집념을 없애는 데는 죽음 밖에 명약이 없다.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찾아오는 죽음이 없었더라면 히틀러나 무솔리니 같은 괴물들이 아직 굼실굼실 움직일 거고 얼마나 많은 죄 없는 생명들이 고통을 당하고 피를 흘렸을까 생각하니 역설적으로 죽음의 필요성까지 느끼게 되고 아이러니컬한 웃음이 입가에 새어 나왔다.
그 넓고 넓은 런던에서 우연히 다섯 명의 옛날 동창생을 만나게 된 것은 큰 기쁨이었다. 친구들 덕택으로 런던 시가지를 벗어나는 일들은 자동차로 편안하게 안내되었고 혼자 다니는 것도 좋지만 옛 친구와 어울려 다니는 것도 못지않게 좋았다. 나는 어느 도시를 가던지 대학이 있는 곳이면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눈으로 가서 보고 느끼고 하는 일을 게울 리 하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겉모양이나 교정이나 혹은 컴컴한 복도를 걸어 다녀도 그 대학의 성격이나 지적(知的) 분위기를 어느 정도 눈치낼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것을 체험하고 다니는 것이 늘 나에게는 어떤 새로움이 갈증을 씻어주는 것 같아서 즐거웠다. 구미 각국에서 많은 대학을 구경했을 때 버클리대학에서 본 어느 시인이 걸레 같은 옷을 걸치고 교문 가까이 공터에서 자작 시를 소리 내어 읊고 있던 것을 보던 순간 남불 엑스 대학 등록기 간 중에 학생활동 오리엔테이션 하는 책상 위에 "피임법을 위한 안내"라는 팻말을 놓고 남녀 학생들이 입구에 앉아 있던 장면이 생각나면서 이 두학교의 어떤 공통된 분위기를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스탠퍼드와 하바드 대학의 도서관에서는 우등생교실을 느껴야 했다. 몬트리올 허허벌판을 달리고 달려서 도착했던 퀘벡시티에 있던 라봘 대학의 방문은 또 하나의 기쁨이었다. 내가 높이 평가했던 어느 서적을 통해서만 보던 박사가 바로 이 대학의 교수였기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뮌헨대학을 보러 갔을 때 우연히 한국인 교수 J 씨를 만났던 것도 큰 기쁨이었다.
옥스퍼드시는 테임즈와 처웰 강이 합류하는 곳에 아늑하게 자리 잡은 16만 인구를 가진 대학 도시이다. 많은 단과대학을 가지고 약 만 명 이상의 학생을 수용하고 있다는 이 대학은 십이 세기 초, 로버트 풀런 (Robert Pullen)이란 신학자와 파리에서 추방당한 몇 프랑스 학생에 의해서 세워졌다. 중세 유럽에 세워진 유명한 대학치고 기독교회 온상이 아닌 것이 거의 없다.
옥스퍼드를 비롯해서 소르본느, 볼론느, 캠브리지, 루뱅 이런 것들이 모두 신학자들에 의해서 움직여졌고 언제나 정치에까지 큰 영향력을 갖기에 이르렀다. 역대 수상이 거의 옥스퍼드와 캠브리지 출신이라고 하니 얼마나 많은 인재(人材)를 내놓았으며 어떤 교육을 시키고 있는지 과히 짐작이 간다. 메그델렌, 성마리, 성피터 대학을 둘러 영국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에스모린 박물관과 보브렌느 도서관을 거쳐 대학 구석구석을 받이 붓도록 돌아다녔다. 여기저기서 더벅머리 젊은 청년들을 만났다. 그들이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어렵기로 말이 아니라는 옥스퍼드대학에 정규학생으로 입학허가를 받고 군 복무하러 귀국한 내 친구 아들 신ㅇㅇ이라는 청년이 머리에 떠올랐다. 머리가 좋다고 자부하는 한국 두뇌들도 이 학교에는 아직 거의 없을 정도라는 말을 들었다. 아마 프랑스의 그랑드 에꼴만큼이나 힘든 곳인가 보다. 이런 어려운 관문을 통과했다는 ㅇㅇ이가 오늘따라 애국을 했다는 기특한 생각이 들었고 그 엄마가 얼마나 대견스러웠을까 생각하면서 이 학교와 인연이 있는 유일하게 내가 알고 있는 그 어린 한국 청년에게 기대를 걸어본다.
문화의 창업이란 것이 가장 정확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공간이 곧 대학이라는 것이 여러모로 증명된다. 대학 입구마다 출세한, 혹은 사회에 공헌한 동창생들의 명단이 붙어 있다. 나는 영국 교육제도에 대해서 물어봤지만 개념이 내 머릿속에 잘 잡히지 않는다. 한국이나 미국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은 확실하고 프랑스 것만큼이나 복잡한 것 같다. 프랑스에서는 공립과 사립의 질의 차이가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공립이 우수한 반면에 영국은 좋은 사립학교가 많고 온 국민이 그것을 선망한다는 것을 알았다.
다음날은 런던시에서 넉넉하게 한 시간쯤 달려서 캠브리지에 도착했다. 상상한 대로 여기저기 넓은 잔디밭이 있고 아름다운 각종 건물들이 자기들의 세월을 잘 느끼고 나가라는 듯이 입을 다물고 서 있었다. 퀸스 대학의 메즈 메디컬브리지 아래는 젊은 선비 뱃놀이꾼들이 유유히 강을 따라 내려가고 있으며 흰 물살로 남는 뱃길은 달(月) 은 없어도 이 태백 같은 시정(詩情)을 담고 있었다. 파리나 런던 같은 큰 도시에 걸린 거창한 교각(橋脚) 들도 멋이 있지만 캠브리지 대학의 해묵은 나무가 우거진 강 위에 걸린 아담하고 단정한 예쁜 다리들을 걸어 다니는 기분이 여간 아니다. 보타닉 가든 건너편 언덕배기 물 위에 떠 있는 연꽃잎들은 한국 어느 한적한 절간의 풍경을 나에게 되돌려준다.
초기에는 옥스퍼드대학 교수와 학생이 여기로 이동해 오는 경우가 많아 종교, 정치이념의 내적갈등, 옥스퍼드에 대한 지성(知性) 사회의 견제 세력의 구실... 등으로 채색된 시간의 때가 묻어 있는 채 엄연히 세계적인 학문의 전당으로 존재함을 본다. 더 좋은 것을 넘겨다 보는 일없이 묵묵히 진리를 탐구하며 혼신을 다해 일생을 바친 이 대학인들에게 마음 깊은 곳에서 묵념하는 기분으로 펨부르크 (1346년에 지음) 건물 앞에 잠깐 있고 싶었을 때다.
멋쟁이로 생긴 두 청년이 내 앞을 지나갔다. 그들은 거의 애무하는 듯한 몸짓으로 무엇을 다정히 얘기하고 둘 중 한 청년은 목걸이와 귀걸이까지 하고 천천히 걷고 있었다. 여기서는 남녀가 손을 잡고 어떤 공공장소에서라도 키스를 한다든가 하는 몸짓은 개인에게나 사회에 아무 저항 없이 자연스럽게 잘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다. 그런데 바로 눈에 뜨일 정도로 이목구비가 단정하고 차림세가 멋쟁이 었던 그 두 청년이 왜 내 눈길을 끌었을까. 무슨 냄새를 나는 맡았는가. 나중에 생각해 보니 역시 내 감각이 정확했다는 것을 알았다. 참으로 느낌의 세계라는 것은 이상한 것에 속한다. 나중에 그들이 남색가(男色家)라는 것을 누가 귀띔해 주어 알았다.
이 나라는 동성애를 법적으로 인정하는 곳이기 때문에 누가 누구를 사랑하고 색다른 성(性) 생활을 한다고 해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영국사회의 놀라운 점은 바로 이런 것이다. 즉 여왕이 존재하고 많은 보수적인 인습에 살면서 동시에 동성애가 인정되고 히피가 나오고 이런 모든 극단과 극단끼리 별 알력 없이 공존(共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름 모르는 두 남색가를 보고는 내 친구 마리옹의 아들 르네가 영국에 공부하러 가서 동성연애에 빠져 방학에도 들어을 줄 모른다고 괴로워하며 전전긍긍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라틴어와 그리스의 곰팡냄새가 풍기는 "정신의 장소"에서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거나 쭈뼛쭈뼛함이라고는 없이 동성애라는 육(肉)의 색다른 잔치 같은 것을 보는 것은 신기로운 풍경이다. 영국에 체류했던 세기적인 남색가, 천재시인 램보와 베르렌느가 사랑할 때 질투가 빚어낸 비극적인 총성 같은 것은 것은 없었으면 좋겠는데…
저녁이 되어 런던 시내에 들어왔다. 비안개에 젖은 거리에 가동(街燈)이 켜진다. 사람들이 많이 지나간다. 내가 몇 년 전 봄베이와 실론섬에서 본 것 같은 흑인 막노동자들이 여기저기 쏟아져 나온다. 무슨 공장 같은 거라도 근처에 있었는지 모르겠다. 프랑스의 아랍 이민객들처럼 그들도 서럽게 살 것이다. 머리 좋은 2세들은 백인은 우월하고 자기 쪽은 열등하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영국 어디, 어느 누구, 어느 상황에서나 숨어 있다는 것을 알고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분노를 혼자 꿀꺽꿀꺽 삼켰을 것이다.
아니다. 어쩌면 그들은 너무 잘 동화(同化)되었는지 아니면 외부 자극에 면역되고 무감각하여 이미 인종문제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불공정, 부조리 같은 것은 관심도 없을지도 모른다. 흑인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언제나 나에게 슬픈 사람들로 남아있다. 몇몇 흑인 친구가 있어 그들의 기질이나 풍속이나 민도를 조금 알고 있는 터이다. 이상하게도 흑인을 아니 흑인 여자를 보면 나도 모르게 연민의 정을 느끼게 된다.
그 어느 무더운 여름밤 프랑스에서는 수단이라는 나라에 대한 현존하는 풍속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방영(放映)되었다. 그다음 날부터 온 프랑스에서는 카페, 대학, 가정할 것 없이 사람이 모이는 곳 이면 어디서든지 그 프로그램에 대한 화제가 등장되었고 비인도적인 그들에 대한 거센 비난이 빗발 같았다. 간단히 요약하면 그 나라에서는 각 가정에서 남자아이를 낳으면 생후 한 칠 혹은 두 칠이 지나면 앞에 할례를 시키고 여자아이는 열 살쯤 되면 생식기 일부를 잘라내는 소위 라딴느라는 수술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수술에 대한 의미의 설명을 들어보면 어처구니가 없다. 남자는 소위 포경수술에 해당하는 것인가 본대 그것은 현대 의학적으로도 의미가 있고 또 남성들의 성생활에도 유리하고 위생적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한다니 그것은 여론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데 여자 아이의 경우는 인간에서 사물로, 노예로 전락시키는 의미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즉 여자는 남자를 위해서 존재해야 하므로 성행위를 할 때 남자만 만족하면 될 일이지 여자는 도구로 얌전히 쓰이면 되기 때문에 도대체 성감이 예민할 필요도 없고 성행위 중에 만족할 필요도 없으니 그 필요 없는 살덩어리는 잘라버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마취도 시키지 않고 가위로 잘라내고 기워 버리는 아주 원시적인 수술현장을 보여 주었다. 열 살 자리 계집애는 죽어 넘어가듯이 울부짖었고 그 수술이 끝난 다음 장면이 더 가관이었다. 즉 그 어머니 되는 여자는 동네 사람들을 모아 놓고 음식을 차려 먹이며 소위 파티 아닌 파티를 벌리고 있었다. 여자는 아이 낳는 기계이며 일부다처제가 통하는 그들 사회에서 부인들끼리 질투도 없는 평화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다니 바로 남성천국임은 틀림없는 모양인데 나 자신도 그 프로그램을 보는 순간 그들 남성 위주의 비인도적인 처사에 분노를 느꼈다.
여자는 언제까지 물건이어야 하나, 노예 이어야 하나. 아직도 지구 위에 가여운 많은 여자가 혼자 울고 있다. 남자들이 구축해 놓은 사회에서 여성이 한 인간으로서 동등한 대접을 받고 있는 사회가 늘어가고 있다 는 사실은 정말 흐뭇한 일이나 모처럼 얻어진 여성들의 인권을 위해서 여성 스스로는 안일이나 화초의 역할에서 탈피하여 깊은 성찰과 노력의 절실함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요원한 곳이 세상에는 여기저기 산재해 있다.
그날 저녁은 흑인여자, 노인, 이런 외로운 인간들의 입장을 생각하면서 인도(人道)를 건너서 어느 중국 식당 앞까지 왔다. 여기저기 중국 식당이 많이 눈에 뜨인다. 피카디리 거리에는 파리보다 훨씬 많은 것 같다. 저녁을 먹으면서 희미한 불빛 속에서 주위 얼굴들을 보았다. 머리가 노란, 얼굴에 굴곡이 많은 사람들만 없었다면 내가 런던 한복판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서울의 어느 짜장면 집에서 먹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생면부지 (生面不知)의 남자와 꽤 오랜 얘기를 한 것 같은데 몸짓조심스럽게 얼굴이 붉어진다던가, 조그만 심장이 팔닥거린다든가 하는 일도 없이 너무나 담담했던 태도는 인생의 첫 행복과 슬픔을 배울 때와는 다른 세월, 자괴(自壊)의 인생행로에 와 있는 것을 어찌하리오.
식당을 빠져나와서는 좀 질서가 없고 뭐가 뭔지 잘 모르는 그 거리들을 나는 황량하고 적막한 기분으로 오랜 시간을 보냈다. 머리 위에는 별들이 낭자해 있었다. 홀로 산책(散策)하는 사람의 정신은 폐허 같았으나 해방 같은 자유로움이 있어 구원이기도 했던 밤이었다.
"나는 촛불을 켰습니다. 열린 창에서 밤이 흘러 들어왔습니다. 부드럽게 나를 껴안고 나를 친구로 삼고 또 형제로 삼아 줍니다. 우리들은 서로 같은 향수로 병들고 있습니 다. 우리들은 예감에 넘치는 꿈을 쫓아다니고 낮은 소리로 우리 아버지집에 살던 옛날이야기를 합니다."
방랑을 해 본 경험이 있는 자는 문득문득 고향이 얼마나 그리운 것인가를 실감하게 된다. 어른이 된 누구에게나 지리적(地理的)인 고향뿐만 아니라 청춘이란 시간의 고향이 또 하나 있다. 정신의 향기가 도는 듯 뿌연 희망으로 안개처럼 감싸여 있는 듯한 여기 대학의 순례자가 될 때마다 나의 시간의 고향이 수줍게 찾아왔다. 그래서 그리움으로 나는 뒤를 돌아보고 또 돌아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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