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세계 문화 예술 기행
  • 세계 문화 예술 기행
  • 셰계 문화 예술 기행
유럽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by 이다인 2024. 5. 22.
반응형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호세 루이 히달고(Jose Louis Hidalgo)의 트럼펫 연주 <그라나다>의 유연하고 약간 애상적이며 폐부에  와닿던 리듬이 좋아서 수십 번 들었던 기억을 되살리며, 나는 프랑스로부터 안달루시아 지방을 향해서 남으로 내려갔다. 마침 남아메리카 대부분의 나라의 가장 긴 방학이 끼어 있는 2월이라  초봄의 스페인은 아르헨티나, 페루, 브라질 등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붐볐고, 반대로 스페인의 일류 투우사들은 모두 남미로 떠나버린 뒤였다.
 
나는 그라나다의 알람브라(Alhambra) 궁과 만난다는 설렘으로, 사철 눈이 덮여 장관이며 스키를 항상 즐길 수 있다는 네바다 산(Sierra Nevada, 유럽에서 가장 높은 해발 도로가 있음)을 지척에 두고도 바로 그라나다에 입성해 버렸다. 유럽의 최남단에 자리 잡고 있는 대신 북아프리카와는 가장 가까운 땅이다.

그라나다의 모습이 차창으로 서서히 다가서고 있었다. 8세기 동안 북아프리카 모로 인들이 회교를 포교하고 그들 문화의 꽃을 피어나게 했던 땅이었음을 한눈으로 볼 수 있었다. 즉 이슬람의 곡선 건축과 유럽의 것이 함께 공존하는 도시이다. 바로 알람브라는 유럽에 남아 있는 가장 중요한 아라비아의 기념비적 궁이다. 흔히 왕족들이 살았다는 궁이란 온갖 부귀영화와 비화가 동시에 존재하는 곳이기 마련이지만, 이곳의 비화도 세계 어느 궁 못지않을 것 같다.
 

알람브라(Alhambra) 궁
알람브라(Alhambra) 궁

 
 붉은 벽에 남아 있는 몇 줄기 누런 햇빛이 비치나, 마치 검은 턱수염이 텁수룩한 어느 군왕이  금의를 두르고 꽃다운 궁녀들을 거느리며 유유히 산책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그라나다 원주민, 기독교에 의해 쫓겨 나온 코르도바의 회교도, 다시 기독교도... 이런 숨바꼭질의 소용돌이 역사를 지닌 알함브라 궁은 그라나다에 남아 있는 가장 값진 이슬람의 예술 유산이다.

대사님들의 거실

이 궁벽을 따라 오르니 우뚝 솟은 탑이 있고, '율법문'으로 통하고 있는 예쁜 보행로가 있는가 하면 '카를로스 5세 궁',  '사자들의 안뜰', '대사님들의 거실', 이런 이름들로 불리는 여러 채의 집들이 서로 연결되어 각각 독특한 디자인과 채색, 세공을 자랑하고 있어서 흥미로왔다. 특히 '대사님들의 거실'은 아랍 왕들의 리셉션장으로 쓰여졌는데, 서양 삼목으로 둥글게 올린 높은 천장, 아주렉죠라는 이슬람 특유의 도기 벽돌, 금속과 벽토를 묘하게 섞어서 왕자들의 이름과 코란의 구절들을 새겨 놓은 아름다운 흙이 있다.
 
 
또 이탈리아에서 건축 공부를 했다는 마츄카(Machuca)의 작품인 '카를로스 5세의 궁'은 스페인 적 감각으로 처리된 특색 있는 공간으로 누구에게나 매료적이다. 마이크가 없던 시대에 확성기의 효과를 연구하여 지었다는데, 어느 방에서는 정말 소리가 크게 울리는지를 사람들이 시험해 보자 과연 놀라울 정도로 음향 효과가 컸다.

그중에서 가장 부담 없고 서정적인 곳은 건물과 건물 사이에 있는 직사각형 목욕탕인데, 물론 요즈음 같으면 작은 수영장에 지나지 않지만 그 시대에는 꽤 괜찮은 곳으로 사람들이 즐겼으리라 여겨졌다. 주변에 잘 손질된 나무들과 우아한 몸짓으로 오가는 궁인들, 배불리 먹고 근심 없이 햇빛을 혹은 달빛을 즐기는 남녀들이 그것을 뒷받침해 준다.
 
갑자기 어느 건물 앞에서 꽤 많은 관광객들이 웅성웅성 그 건물의 이층 난간과 조그만 방 창문들을 쳐다보고 서 있었다. 얼른 설명책자를 끄집어내어 읽어 보았더니 '후궁들의 방(Harem)'들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공적생활과 사적생활의 공간을 따로 지니게 마련이다. 공적 생활공간을 따로 갖는 것이 거의 허락되어 있지 않았던 그 시대 여자들의 일생은 말할 것도 없지만 지금도 이 점만은 그렇게 용이한 것이 아니다. 물론 서구 선진국에서는 그렇지 않지만 아직도 아랍 제국에서는 여성들의 공적 생활공간이 거의 없다. 한 나라의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를 보려면 그 나라 여성들이 얼마만큼의 공적 공간을 이용하고 사느냐를 보면 된다.
 

하렘
하렘

 소위 하렘은 '갇혀 있는', '닫혀진', '묻혀 있는', '묶여 있는' 불쌍한 여자의 상징이며 노예화된 여성의 공간이다. 하렘을 보고 있는 동안 잠시 슬펐다. 여자와 남자의 생리 자체가 틀리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한다. 남자가 하는 일 중에 여자가 할 수 없는 것은 거의 없으나, 남자가 할 수 없는 일 꼭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남자는 아이를 직접 낳는 일만은 못 한다. 국민 된 도리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남자에게 병역이라면 여성에게는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병역의 의무를 지고 있는 남자를, 국민을 생산해 내는 바로 근원적인 임무를 여자가 맡고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그 귀한 여성에게 동등한 인간 대접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다. 어느 사립 여고 교사로 있다가 임신했다는 이유로 쫓겨나게 되었던 친구의 울먹이던 모습,

열여섯 살에 시집와서 남편의 무관심 속에 60 평생을 처녀로 살고 가셨던 내 외숙모님... 이런 여인들이 괴로워하며 저 하렘 창문마다 얼굴을 내밀고 내게 구원의 손짓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19세기말 유럽에서는 졸라, 아나톨 프랑스... 등 여러 작가들이 '하녀 문제'를 테마로 다룬 소설들을 내놓았다. 그것은 단순한 하녀 문제가 아니다. 구체적인 여성 문제로 보는 것이 옳겠다.
 
이런 류의 작품에서는 으레 돈 많은 귀족이나 부르주아 출신 남자들이 자기 집 하녀들의 순결을 빼앗거나 즐기고는 하녀가 주인마님께 들켜 모욕과 저주 속에 쫓겨나는 것을 무책임하게 내버려 두는 줄거리들인데, 언제나 주인 남자의 행위는 이해되고 변명되어 용서받고 합리화되는 반면, 하녀는 죄인 취급을 받고 모욕만 당한 채 구제 불능이 되어 그 사회에서 쫓겨 나가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하녀의 역할은 인간의 흉사 길사 중에서 임종을 지키게 하는 일이나 남성들의 야욕을 채우는 도구에 배당된다. 즉 인격을 배제시킨 동물 상태로 전락시킨다. 이런 종류의 소설이 그 시대의 한 테마가 되었다는 것은 바로 남성 우위 사회에 대한 고발 내지 투쟁으로 보고 있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도 여성은 인간적인 대접을 받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과연 우리 한국 사회에는 보이지 않는 '하렘'이 없는가? 이런 착잡한 생각을 하고 걸어가는데, 같이 온 프랑스 친구가 15세기에 어느 왕이 하렘 생활을 즐기느라고 국정을 소홀히 했다는 얘기와 비적에 의해 길러진 아름다운 한 기독교 아가씨에게 반해 회교도인 왕비를 버렸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해가 저무는 저녁녘 알람브라 궁에서 내려와 그라나다 시내를 걸으면서 이러한 착잡한 마음이 있음에도 이국의 묘한 매력적인 정취에 흠뻑 젖는다.
 
 


https://youtu.be/1qo7vmEMEC8?si=ZUfFXv0Z9m62cv7O
 
 

Granada, trumpet

 


 

알람브라궁 정원
알람브라궁 정원


 

알람브라궁
알람브라궁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