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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수인(囚人)의 공간 엘바섬, 이태리 <feat. 나폴레옹 유배지 >

by 이다인 2024.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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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囚人)의 공간 엘바섬, 이태리   <feat. 나폴레옹 유배지 >

 

오후 3시는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고 끝내기에는 빠른 시간이라고들 불평한다. 그런데 오늘 나의 오후 3시는 시작하기에 안성맞춤인 기분이다. 이태리 서부 해변도로를 아침 8시부터 달려왔으니 로마로 들어가려면 아직도 해변 풍경 속을 한참을 달려야 할판인데 도중에 엘바섬에 들른다는 것은 시작치고는 아주 괜찮은 시작이 된 셈이다.

엘바섬

"이제 여러분들의 목적지인 엘바섬에 곧 내리겠습니다" 하고 마이크로 여러 나라 말로 방송했다. 1백여 명이 탄 배 위에서 우리 앞 좌석에 중국말을 하는 한 가족 외에 동양 사람이라고는 없었다. 배를 탈 때부터 일거 일동을 관찰하듯 호기심으로 바라보고 있던 한 늙은 이태리 부인은 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내릴 적에는 내 가까이 다가서며 혀를 유난히 굴리면서 일본에서 왔느냐고 물어본다.
 
한국인이라고 하니  "아 그러세 요, 반갑습니다. 나는 한국인 조카가 하나 있습니다. 내 동생이 서울 고아원에서 양녀로 데려왔습니다." 그제야 그 노인의 특별한 관심의 시선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이 섬을 샅샅이 잘 안다고 하면서 자기가 기꺼이 안내하고자 하니 같이 산책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지만 우리 일행이 보시다시피 다섯 사람이나 되니 걱정하시지 말라고 했는데도 자기 집에 온 손님을 모셔야 할 것 같은 몸에 밴 친절감을 보이면서 대단히 서운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모나코를 넘어서고 이태리 땅에 들어서자 말자 세계 제일 광광국을 인정해 줄 수 있는 징표의 하나는 그들의 친절이다.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영독연합군에 패하고 유배를 당해야 했던 세인트헬레나섬은 어떤 곳이었는지 모르지만  유형도 (流形島)라고 생각했을 때 답답증이라든가 불모성 (不毛性)이라든가 하는 극도로 부정적인 환경조건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20세기 문화국 대도시 시민인 우리들이 더 많은 공해 속에 유배를 찌들어지도록 당하고 있는 것일 게다.  
 
온 유럽을 삼키고 러시아까지 노리던 그런 야망만 없었더라면 나폴레옹도 도연명(陶淵明) 같은 신선놀음을 이런 곳에서 하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토스카나의 신비"라 는 말은 바로 이곳의 산천초목, 맑은 햇볕을 두고 말하리라. 이 지방의 군도 (郡島)들 중에 몬테크리스토엘바는 너무나 잘 알려진 것들이며 특히 엘바는 토스카나 군도 중에 가장 중요한 섬으로 기록돼 있으며 규모야 다르지만 1백50여 종이나 되는 아열대식물과 기암괴석으로 되어 있다는 우리나라 여수의 오동도쯤으로 비교될 성싶다.
 

엘바섬 위치, 위키백과
엘바섬 위치, 위키백과

 
이태리 대부분 관광지 근처 주차장의 제철은 언제나 그러했지만 배표를 사놓고도 주차를 위해서 오랫동안 서성 거리며 기다려야 하는 것이 이곳의 풍경 중의 하나이고 또 이태리가 초행이 아닌 사람은 이들의 사는 방법을 약간 터득하고 보면 자연히 얇은 지혜가 얻어지기 마련이다. 즉 몇 리라만 더 주면 금방 자리가 마련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불 엑스에서 이태리 국경까지는 서울에서 대전 남짓한 거리밖에 안 되고 물가가 프랑스 보다 싼 탓으로 방학이면 혹은 주말을 이용해서 자주 드나들게 되는 곳이다.
 
이곳의 자연 예술, 선조들의 유산으로 아마 영원히 모든 인류가 이태리를 끔찍이 사랑할 일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태리 국경을 넘어서면 전혀 긴장할 필요가 없다. 국경을 지키는 유니폼을 입은 경찰은 한쪽 눈으로 여권을 훑어보며 또 한눈으로는 아름다운 여자들에게 윙크하느라고 바쁜 그들이다. 또 기차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종착역  (Stagione Termini)"이란 영화에서 보던 현대식 국제역에 내릴 것이다.

특히 나같이 종족을 뚜렷이 나타내는 외국인이고 보면  호텔과 숙소 안내자들의 공세를 면할 길이 없다. 처음에는 당황했다가 나중에는 값을 흥정하는 축들을 비롯해서 또 어떤 사람들은 아무래도 못 믿겠다는 듯이 안내소 앞에 가서 줄을 서기도 한다. 질서 정연한 중, 북부 유럽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도떼기시장 같은 인상을 받을 것이다. 좋게 말해서는 정이 많은 사람들이다. 어디를 가나 과잉 친절과 과잉 마음의 표시에 가끔 당황할 때가 있는가 하면 길거리나 공공장소에서도 큰 소리로 떠들고 기분 나는 대로 목청을 높이고 손의 위치는 배부터 시작해서 신이 나면 가슴, 목, 머리 나중에는 허공에 손을 쳐들어 흔들며 얘기들을 하며 클라이맥스 장면에는 그들의 웃는 얼굴만 빼놓으면 곧 치고받고 하지 않을까 하고 초조하고 민망하기도 하다.

줄리앙 그린은 이런 기질을 다음과 같이 기록해 주었다. "피가로의 결혼은 내가 가장 좋아하지 않는 모차르트의 작품이다... 이 '결혼'은 빛이 너무 쨍쨍한 가운데 있다. 그것은 실명의 빛이고  이태리적인 빛이며 때로는 귀가 먹먹해지는 빛이다. 이 공격성의 즐거움은 나를 도망치고 싶도록 한다" 하기야 라틴 민족의 정수(精髓)들이 사는 곳이니까 나무랄 수 없는 당연함이다. 오히려 그들의 분분한 삶이 없으면 이태리가 아니다.

바로 엘바섬에 들어서기 전에 나는 작은 섬 하나를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우리나라 서해의 절경이라는 백령도 같은 인상을 주었으며 모든 삶이 낮잠을 자는 건지 우리가 지나가는 데도 꿈쩍 않고 본체만체하는 걸 보니 무인도 같기도 했다. 배에서 내려서니 마침 부두에서 베르트랑궁까지 가는 왕복버스가 있었고 이삼십 분 꼬불꼬불 언덕길을 타고 갔다. 건조한 철이라 자동차가 지나갈 때마다 먼지는 않았지만 도중에는 포도밭이 많이 눈에 띄고 언덕바지에는 올리브, 삼, 종려나무들이 서 있었다. 역시 나폴레옹 같은 거장(巨將)을 귀양시키기로는 적당했다고 생각되는 점은 섬 주변이 깎여진 절벽이 많고 바위로 된 험준한 서쪽은 탈출 같은 것이 어렵게 되어 있다고 한다. 결국 탈출을 했지만...

우리 일행은 약간 경사진 길을 따라 올라갔다. 주변에는 싸구려 기념품 가게가 몇 군데 있었고 음료수를 파는 집 앞에는 남자들이 몰려 앉아 지나가는 여자들에게 실제로는 용기도 없고 환심을 살 준비도 되어있지 않으면서 노골적인 추파의 말도 걸고 하는 풍경은 그렇게 밉지는 않았다. 마르세이유의 엑스문 근처 동네에 들어서면 여자 없이 온 젊고 혹은 늙은 아랍 노동 이민객들이 몰려 앉아 처량하게 이상한 눈으로 지나가는 여자들의 다리를 응시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가끔 측은한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빌라는 그렇게 크고 웅장하지는 않았지만 거기서 내려다보이는 파노라마는 누구에게나 행복하도록 하기에 손상이 없다. 아마 거기서 나폴레옹은 저 앞바다 건너편에 있을 고향 코르시카의 얼굴들, 거리, 해변을 매일 꿈꾸었을 것이다. 빌라는 네 개의 원기둥으로 받쳐졌다. 입구와 양 옆에 높이 날개를 죽치고 있는 두 마리 독수리 석상과 뜰에 들어서기 전 철대문 위에 있는 비상직전의 두 마리 독수리가 무슨 상징일까 생각했다가 유고가 나폴레옹에게 독수리라고 쓴 것이 그때 생각났다.
 

독수리 석상
나폴레옹 빌라와 독수리상

 

 

 

나폴레옹 침대

유배생활 때 쓰던 침대로 말하면 내 눈에는 황금시대 때 퐁텐블루성의 것과 별 차이가 없이 화려하기만 했다. 이토록 아름다운 곳에 묶였던 죄수의 고독이란 것이 어떤 종류의 것이었을까를 상상해 보다가 적어도 섬이란 곳에 귀양살이를 했던 그들은 행복했던 생활을 했다는 결론을 얻었다.

 

 

인간이 영(靈)과 육(肉)의 소유자임이 틀림없는데 육의 공간이 오늘날 형무소처럼 조그만 방구석에 밀쳐져 있으면 모르되 이런 자연 속에 억류되어 이 조그만 몸뚱이를 맡길 공간이 좀 제한되었다고 해서 그렇게 불행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정말 불행한 것은 인간은 무한 자유를 갈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영(靈)의 공간이 저해받을 때다. 즉 육의 공간이 유한인데 반하여 영의 공간은 무한이기 때문이다.
 


「벽」이란 제목이 붙은 사르트르의 한 죄수의 공간을 보면  "감방은 병원 지하실이었다. 바람이 새어 들어와 무척 추 추웠다. 우리는 지난밤에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낮이라 고 더 나을 것도 없었다. 나는 이 닷새 동안에 대사교 주교관의 골방 속에서 보냈다.  그건 중세기에 지은 일종의 지하 감옥이었다. 죄수는 많고 장소는 모자라 아무 데고  잡아넣었던 것이다. 나는 그 골방이 별로 탐나지도 않았다.  춥지는 않았지만, 혼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혼자 있으면 마음이 초조해지기 마련이다."

"밤하늘은 맑게 개어 있었다. 그러나 이 어두운 구석에는 한줄기의 빛도 스며들지 않았다. 북두칠성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여느 때와는 다르게 보였다. 나는 그저께 사교관 지하실 감옥에서 큼직한 한 모퉁이를 쳐다볼 수 있었다. 그때는 시간시간 색다른 추억에 사로잡히는 것이었다 다. 아침나절에 하늘이 푸르고 맑게 보일 때에는 대서양 바닷가의 모래사장이 생각났으며 한낮에는 고너리와 올리브를 먹으면서 만자니라를 마시던 세베리아의 바가 생각났다. 그리고 오후에 그늘이 되면 투기장의 한쪽은 햇볕에 반짝이고 다른 한쪽에는 짙은 그늘이 번져가고 있었을 일이 생각났다. 이처럼 지상의 모든 것이 하늘에 반영되는 것을 보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우리 시대의 죄수의 장소는 누구를 막론하고 벽으로 둘러 쌓여 있다. 벽은 마치 수인들의 집의 대명사처럼 되었다. 하기야 최근에는 네덜란드 같은 나라에서는 수인들의 대접이 융숭하여 교도소시설에 오락실, 식당이 따로 있는가 하면 모든 위생시설, 경보장치가 되어있는 14층이나 되는 높은 건물로 온 암스테르담을 한눈으로 볼 수 있는 일류 호텔 같은 곳도 있지만 이것 역시 서슬 푸른 칼 같은 도시성임에 어쩔 수 없다. 이 세계에는 보이지 않는 벽도 수없이 도사 리고 있다. 예를 들면 아랍 제국들과 아프리카, 동양에는 아직도 수많은 여성들이 높은 벽속의 존재가 되어 살고 있다. 우울한 일이다.

벽!  벽이란 것이 인간생활에 필요 불가결한 것이라면 그것은 낮으면 낮을수록 좋다. 행복하다. 나는 유년시절에 가끔 노할머니를 뵈러 여름방학이면 시골에 내려가곤 했다. 진흙, 짚, 돌을 으깨어 울타리를 해놓았고 울타리 위에는 몇 개의 기왓장이 얹혀 있고 드문드문 풀들이 자라 있던 그 벽은 장독대와 아침이면 유난히 싱싱하던 나팔꽃과 더불어 평화롭고 행복하기만 했던 것 같다. 나는 확실히 그 물질적 풍요와 편리한 선진 사회에서 일종의 살기가 도는 현대콘크리트벽에 짓눌리는 듯한 이상한 공포를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역설적인 말이지만, 탐라섬이나 엘바섬의 죄수들은 행복했던 인생들이었다. 그들은 푸른 초목들의 숨소리도, 공중에 나는 새들의 지저귐도, 푸른 하늘, 바다를 언제나 느낄 수 있었을 것이고 구름이 끼고 폭풍우 이는 날이면 달과 별이 숨어버리는 것까지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사르트르의 죄수가 지하감방에서 그토록 그리워했던 것은 여자도 아니요 호화저택도 아닌 대서양바다의 모래사장, 과일과 햇빛이었는가 하면 까뮈의 소설에서도 같은 증세를 보이고 있다. 페스트의 도시 오랑에 갇힌 파리에서 은 신문기자 랑베르가 초조하게 시간을 죽여내야 하는 장면에서 자연의 풍성한 세례를 받는 격인 야자수와 해변의 길로 아름다운 지중해의 거리들과 예술의 도시를 강렬히 그리워하는 것을 본다.
 


"벽에는 포스터가 서너 장, 방돌이니 칸느에서의 즐거운 생활을 펼쳐놓고 있었다. 여기서 랑베르는 곤궁의 바닥에서 볼 수 있는 그 무시무시한 일종의 감촉을 느끼곤 하는 것이다. 그 당시 그로서 견디기 가장 힘들었던 이미지의 하나는 적어도 에게 그가 말한 바에 의하면, 파리의 그것이었다. 낡은 석조건물들과 물의 풍경, 르와얄의 비둘기들, 북역, 빵떼옹 근처의 인기가 드문 구역 그리고 자기가 그렇게 사랑하고 있었던 것을 몰랐던 그 도시의 몇몇 고장이 랑베르를 붙들고 늘어져서 어쩔 줄 모르게 하는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 자연이라는 것을 한순간이라도 격리시켜보라. 우리는 금방이라도 벽속에 갇힌 죄수의 미칠 것 같은 답답함을 느껴야 한다. 파리가 수백 년 그 돌벽으로 된 집들 군(群)으로 되어 있지만 아직도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현대  "벽" 으로 느끼지 않고 있는 것은 필요한 푸른 공간에 아름들이 늙은 나무가 버티고 있고 아스팔트 혹은 돌바닥으로 깔린 상제 리제라는 국제적인 대로 주변에도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곳에는 언제나 흙, 자갈, 초목이 있지 않은가. 이끼를 덮고 서있는 분수들은 불어 오른 젖통을 풀어놓듯 항상 물을 품고 있고 다분히 유혹적인 센 강은 누구나 반기고 기다려준다.

대도시 대부분이 폭력이나 독재나 호전성의 상징으로 생각될 때도 로마와 파리가 진선미의 이미지를 상실하지 않는 것은 나의 편견만은 아닐 것이다. 예술이 존재하는 도시는 아무리 그것이 돌로 건축되어도 결코 감옥으로 느껴지지 않음은 말할 것도 없다. 로마를 잘 아는 사람은 미국의 신흥 도시의 고급사무실 밀집지역을 연상시키는 로마시외로  몰아붙여진 에우르라는 이 동네를 보고 이태리 사람들이  얼마나 로마시를 원형 그대로 유지하기를 원하는 가를 한눈에 볼 수 있으며 또 얼마나 콘크리트벽의 도시화를 거부하고 있는가를 알게 된다. 파리를 들른 사람은 한쪽으로 밀려난 라데빵스라는 지역의 초현대식 괴상한 건축물들이 남의 눈치 보지 않는 마천루의 기상을 자랑하듯 운집해 있는 것을 보면 또 얼마나 불란서 국민들이 아름다운 파리를 유지하기에 노력하고 있고 콘크리트 벽이 암세포처럼 번식하는 그 촉수를 거부하는가를 피부로 느끼게 된다.
 
유럽의 에우루라데빵스 두 지역은 예술을 지극히 사랑하는 두 국민이 현대 건축가들의 광적인 벽의 도시설계를 마지막 궁여지책으로 받아들였던지 아니면 건축가들에게 마음대로 창작성을 발휘해 보라는 듯이 놀이 공간을 내 준 기분이다. 대도시의 상징은 어떤 것이었나. 뉴욕, 워싱톤, 레닌그라드, 모스크바, 동경 등 이 모두는 기세 등등한 국제세력의 힘의 공간이며 경제세력의 공간이기도 하다. 어차피 극도로 현대화된 대도시는 우리에게 위협감을 주는 감옥처럼 생각될 때가 많다. 그러면 우리는 제한된 기간의 유형을 마치는 것이 아니라 기약 없는 인생 귀양살이를 하고 있단 말인가? 이런 우울한 생각을 잠깐 하면서 나폴레옹 별장을 구경하고 버스 역으로 왔더니 막차가 이미 떠나버렸다.

우리의 여장이 다 육지에 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마지막 배를 타야겠다는 일념으로 다섯 명을 다 태워줄 차도 없지만 우리는 닥치는 대로 손을 들어 소위 오토 스톱을 했는데 두 명, 두 명, 한 사람 모두 따로따로 도착해서 부두의 담배가게 앞에서 나중에 다 만났고, 배도 무사히 탈 수 있었다. 진땀을 빼면서 아슬아슬하게 뛰어갔을 때 먼저 차를 탔던 우리 아이들은 이미 아이스크림까지 하나씩 들고 빙그레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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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바섬 슬라이드 사진 7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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