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스고덴에서, 스웨덴
노르웨이의 구스타브 뷔즈랜드(Gustave Vigeland, 1869∼1943)와 스웨덴의 칼 밀스(Carl Milles, 1875~1955) 두 조각가의 작품을 보지 않고 돌아간다면 그것은 북구 방문의 부끄러움이다. 이들 두 예술가에 대한 그들 국민의 긍지는 대단하다. 여름의 스톡홀름은 지상의 낙원이다. 기후, 산천의 아름다움, 사람들의 여유, 도시의 우아함, 한마디로 나는 첫눈에 반해 버렸다. 시간만 있으면 오래 좀 머물고 싶은 도시이다.
지금까지 스웨덴에 대한 나의 관심은 지극히 피상적이었다. 나의 최초의 관심은 대부분의 내 또래 한국 여성들처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여주인공 잉그릿 버그만에서 시작된다. 지금도 나는 그녀가 출연했던 두 영화를 잊을 수 없다. 특히 암으로 투병 중, 타계하기 전에 촬영한 마지막 작품 <가을의 소나타>는 참으로 종(鐘)과는 전혀 다른 감동을 주었다.
한 여성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세상을 살면서 자기실현을 철저히 하고 떠나간 사람이라 그녀의 삶에 나는 많은 가치를 두고 있다. 속기(俗氣)와 천기( 賤氣)가 배제된 자연스럽고 우아한 그녀의 아름다움과, 인생을 달관한 듯한 한 옥타브 낮추어 시작하던 목소리, <가을의 소나타>에서의 우수에 젖은 표정을 나는 잊을 수 없다. 버그만이 젊었을 때 무대로 삼았다는 스톡홀름 극장을 낮에 구경했다. 어디선가 대사를 외면서 포도주색 긴 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내 앞에 나타날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스웨덴에 대한 내 지식은, 버그만 이외에도 사회보장 제도가 잘 되어 있고, 국민 소득이 높으며, 과학이 발달하여 세계 특허를 유난히 많이 갖고 있으며 노벨상을 준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것뿐이라 별 기대감 없이 밀스고덴 조각 공원에 발을 들여놓고는 환희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거기까지는 시내와 꽤 떨어진 거리라 갈 때는 어떤 친절한 부인의 설명대로 203번 버스를 탔고, 돌아올 때는 바로 그 앞에 있는 전철을 탔다. 밀스고덴에서 나온 사람들이 너무 많이 기다리고 있어서 첫 번째 차를 놓쳐 버렸다.
밀스고덴 ( Milles Garden, 밀레스 가든) 은 스톡홀름 교외 작은 섬 속에 있는 'Lindingo' (리딩외)라고 부르는 칼 밀스의 생전의 처소, 아틀리에, 정원을 모두 합친 공간인데, 내 눈짐작으로 5천 평쯤 되는 것 같다. 대문으로 들어서서 다른 방문객들이 하는 대로 표를 사고 몇 개의 그림엽서와 소책자 하나를 샀다. 그의 처소와 아틀리에에는 소품들이 구석구석 정연하게 자리 잡혀 있고, 작품을 감상하는 군중들은 세계 도처에서 몰려와 있었다.
실내 소품들을 구경하고 정원으로 발을 내디디는 순간 “이런 아름다운 곳이!”하는 감탄이 나도 모르게 흘러나왔던 것 같다. 꿈꾸는 듯, 호수처럼 누워 있는 발트 해가 저 발아래 있는가 하면, 주변 수목들과 집들은 한 폭의 그림이며 신의 특별한 은총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작품이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자연이라는 것에 인간의 물질문명과 정신문화의 균형을 가미한 아름다움의 극치라고 표현해도 그 누가 과장이라고 감히 말하지 않을 것이다.
스톡홀름이 유난히 나에게 매력 있기는 했지만 밀스고덴에 와 본 사람이라면 칼 밀스의 고도의 심미안이 어느 정도인지 가히 짐작이 한 것이다. 소책자에 나타난 그의 일생을 보아도 멋있는 일생을 한껏 살다 간 사람이다. 그는 가장 정력적인 활동 시기를 거의 미국에서 보냈고, 또 유럽에서는 조각의 본고장인 이탈리아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씌어 있다. 만년에는 주로 이탈리아에서 작품 생활을 하면서 여름철에만 이 Lindingo에서 부인과 같이 지냈다고 한다.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다는 부인도 화가여서 일생 동안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지냈다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는 어울리는 사람끼리 잘만 만나게 되면 파라다이스를 이루게 되나, 잘못 만나면 비극 중의 비극이다. 칼 밀스 부부는 바로 지상에서 천국을 살다 간 사람들이다. 이런 아름다운 공간에서 어울리는 한쌍이 그들의 ‘자녀’들인 수많은 작품을 빚으면서 일생을 행복하게 살다 간 그들은 신의 축복을 듬뿍 받은 사람들이다. 이제 고인들은 생전에 가꾸어 놓은 정원 한가운데 지어진 작은 예배실에 함께 고이 잠들어 있다.
정원 분수의 여러 검은 조상들 중에 오른손에 큰 고기 한 마리를 들고 전형적인 스웨덴 사람처럼 키가 크고 근육이 살아 숨쉬는 것 같은 나체 모습의 남자가 참으로 진지한 표정으로 물을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 유난히 인상적이다. 이런 분수를 정원이나 광장에 많이 만드는 것은 대개 남유럽 특유의 취향인데, 이런 분수를 태양이 여린 지구 북쪽에서 만나게 되니 남국의 풍경이 연상된다.
얼어붙은 겨울철에는 물을 다 빼 버리고 여름철 그들 체류 기간만 즐겼던 모양이다. 현대의 실력 시대이니 능력 시대이니 하는 말은 전천후 인생을 살 수 있다는 말과 통한다. 즉 세상을 살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골라서 할 수 있는 선택권이 부여된다는 뜻이다. 바로 칼 밀스는 후조(候鳥) 인간이며 전천후 인생의 주인이었다.
이 정원의 특징은 평면적이 아니라 다분히 입체적인 분위기를 살리고 있는 점에 있다. 100여 개, 10개, 5개, 3개... 이런 계단을 만들어 굴곡을 주었는가 하면, 분수를 앞에 두고 있는 건물은 다갈색 단층으로 편안한 프로방스 스타일의 집이 겸허하게 앉혀 있고, 정원 한가운데는 10 미터 가까운 흰 대리석을 높이 세운 위에 날렵한 두 날개가 달린 검은 천사들과 손 위의 조상… 이 모두는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고 한다.
그는 생전에 그리스와 로마의 중요한 조각들도 꽤 많이 수집했다고 한다. 이 많은 작품들 가운데는 외국 체류 중 제작한 것이 많았을 텐데, 그 무거운 돌들을 어떻게 그의 조국으로 모두 운반해 놓았는지 신기할 뿐이다. 인간에게 '뿌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또 한 번 절감한다. 고향이 없는, 뿌리가 없는 인간은 이미 표류자인 모양이다. 의미가 없는 인생인 모양이다. 칼 밀스의 삶은 많은 천재들이 그러하듯이 한 궤도 위를 교과서적으로 지나간 것이 아닌 종횡무진, 자유로운 시간과 공간의 주인이었다.
나는 작은 건물을 거쳐 이 집주인의 숨결을 곳곳에서 느끼면서 후원으로 옮겨 갔다. 때마침 한 젊은 생존 작가의 조각전이 열리고 있었는데, 재료·기술·표현 모두가 칼 밀스와는 흑백만큼이나 다른 대조를 이루고 있는 점이 재미있었다. 우선 돌이 아닌 통나무 재료를 쓰고 있었고, 음·양각이 뚜렷하지 않으면서 한국인 치마폭 같은 편안하고 넉넉한 아름다운 균형감이 감돌며, 무엇이라고 꼬집어 낼 수는 없으나 치아를 드러내지 않는 미소 같은 조용함과 유연함이 조각가의 매운 손끝으로 여물어졌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는 고운 작품들이 후원에 전시되고 있었다.
앞 정원에 있는 칼 밀스의 작품이 세련된 서구적 감각을 표출한 예술적 분위기면, 후원의 목조각 들은 신비감이 돌며 따뜻하고 정갈하며 머금고 있는 듯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그래서 예술가에게 개성이 없으면 의미의 부재(不在)나 다름없다. 같은 공간에 대조적인 두 예술가의 작품을 전시한 그 자체 또한 높은 전시 운영 기술이다. 여기 모여든 모든 사람들은 예술가의 정신이 도처에 젖어 있는 우아한 분위기에 확실히 행복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칼 밀스는 세상의 뛰어난 천재 예술가들처럼 그의 가장 귀중한 것들을, 가장 아름다운 것들을 후세의 우리 모두에게 무상으로 돌려주면서 날마다 향연을 베풀어 초대한다.
밀스고덴 담 언저리 키 큰 나무 숲 속에서는 이름 모를 새들이 목청을 가다듬고 있었다. 갑자기 새들의 노랫소리는 핀란드가 낳은 거성 시벨리우스(Jean Sibelius, 1865∼1957)와 노르웨이가 낳은 ‘북쪽의 쇼팽’이라는 그리그(Edvard H. Grieg, 1843~1907)를 불러들이는 듯했다. 꽃들이 겸허하게 피어 있는 정원을 산책하고 있으면 내가 특별히 좋아하여 자주 듣는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콘체르트>가 핀란드 인의 비애를 몰고 신들린 듯한 음률로 들려오는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난다.
그리그의 우울한 〈솔베지의 노래〉도 아련히 귓전에 퍼져 온다. 그리고 입센, 뭉크, 그리그 세 노르웨이 예술가들도 우정 어린 생전의 모습으로 수런수런 무엇인가 나에게 얘기해 주는 것 같았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스칸디나비아의 예술가들과 그들의 삶이 밀스고덴에서 환상적으로 확산되던 시간이었다. 잔잔한 지중해와는 다른, 백야의 검푸른 발트해의 물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내가 오랫동안 들어오던 시벨리우스와 그리그의 슬프고 부드러운 서정적 분위기의 음률들이 조금 더 이해가 되는 것 같다.
https://www.youtube.com/watch?v=Y-NPLzZAaBs&pp=ygUQ67CA66CI7IqkIOqwgOuToA%3D%3D
https://youtu.be/eU91XVzdfdA?si=sEkfSDzreWSaRMuc
'유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런던의 테이트 브리튼 미술관, 영국 (1) | 2024.03.29 |
---|---|
에즈(Eze) 빌리지, 프랑스 (0) | 2024.02.21 |
마르세이유 항구, 프랑스 (2) | 2024.01.19 |
바르셀로나의 바리오 고띠꼬, 스페인 (3) | 2024.01.05 |
숲의 나라, 음악의 향연장/ 오스트리아 (4) | 2023.12.1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