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어키가 유럽과 동양 두 쪽에 다 속해 있는 나라라는 것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유럽 이스탄불은 꼬른느 도르강을 중심으로 구도시와 신도시로 또 나누어져 있다. 강 아래서 바라보면 도시 윤곽만 드러나는 눈부시도록 황금빛을 발하는 일몰의 시간과 강하류 에이윱(Eyup) 쪽 언덕에서 내려다보이는 한강 규모의 아타 투르크와 갈라타의 긴 교각이 출렁거리는 푸른 물 위에 걸려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파노라마이다. 이렇게 위에서 내려다보거나 아래서 여유 있게 쳐다보는 묘미를 여기서 느껴봐야 제격이다.
터어키의 사회구조는 부챗살 펼쳐놓은 모양 같다고 했던 친구 파부아와 터어키를 둘러보고 온 다른 친구들이 아직 이스탄불을 보지 못한 것은 대단한 유감이라고 말하던 것이 그제야 무슨 말인지 실감 났다. 이스탄불은 묘한 도시다. 그야말로 부채꼴같이 부와 빈, 미와 추, 높고 낮은, 고도의 문화와 저질 문화, 동양과 서양, 이 모든 것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 이런 도시를 일찍이 나는 본 적이 없다.
특히 역사적 유물만 보더라도 고대 그리스의 찬란한 문화와 동방의 융합시대였던 헬레니즘의 흔적, 아직도 잘 보존되고 있는 비잔틴과 오토만 제국의 유산들은 바로 세계 모든 조형예술의 중요한 출발지이며 집산지가 아닌가 생각된다. 한 마디로 대단히 놀라운 도시다.
내가 처음으로 터어키인들을 집단적으로 많이 보게 된 것은 벨그라드에서 보잘것없는 유고 비행기를 타고 이스탄불에 도착했을 때다. 무더운 8월인 데다가 비행장 내 냉방장치가 부분적으로 되어 있어 입국 수속을 하는 동안에 후덥지근한 가운데 짜증스럽게 오래 기다려야 했던 것은 독일에서 귀향하던 수많은 터어키 노동자들과 그들의 짐짝들 때문이었다.
도시 관문에서 받은 시민들의 인상과 단연코 세계 보물 중의 보물인 수많은 이슬람교의 사원들과 궁전들을 같이 생각하면 도저히 그들의 조상들이 그렇게 눈부신 문화를 창출한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모두가 건축예술의 걸작들이다.
쉐라톤, 힐튼과 같은 현대 호텔들이 모여 있는 신시가지에서 아따 투르크의 긴 다리를 하루에도 몇 번씩 건너 구시가지의 유명한 聖 소피아 대성당을 비롯해서 성 이렌느 교회, 블루 모스크, 베이야지트, 프린스, 솔리망 르 마니피크, 꽁께랑 등의 회교 사원들과 톱카프 궁전, 그리고 많은 것들을 보러 다니느라고 진땀을 빼며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이상의 모든 건축물들은 모두 현대 터어키의 아버지로 불리며 존경받는 공화국의 첫 대통령으로 선출된 무스타파 케말 (1881~1938) 이전에 지은 것들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문화적 가치로 인정받고 있는 것은 비잔틴 제국을 완전히 멸망시킨 정복자 터어키 회교국의 황제인 메흐메트 (Mehmet) 2세 때 짓기 시작했던 토카프 궁전이다.
대개 여러 나라 왕궁들과 성들은 거의가 경치가 빼어난 곳에서 있지만 그중에도 톱카프 궁전의 지형선택에 대한 안목을 높이 평가해야 될 것 같다. 60만㎡의 표면으로 이루어진 총 건물들은 모두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가 하면 정자, 운동장, 정원 필요한 모든 것들이 다 제자리에 놓이고 규모가 대단한 궁이다. 특히 인상적인 곳은 요소요소에 첨탑이 있는 성벽에 7개의 궁문이 있는데, 그중 4개는 내륙에 있고 3개는 바다 언저리에 접하고 있어, 확 트인 푸른 공간에 드문드문 물새들까지 날고 있는 그곳이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다.
홀 구석구석마다 화려하게 채색되어 있는가 하면 구조 또한 단순하지 않아 마치 문 한 짝 한 짝 뒤에 신비스러운 세계가 숨겨져 있는 것 같고, 높고 낮은 창들의 치장이 대단하여 유리 한 조각 한 조각이 모두 걸작이다. 보석이 주렁주렁 붙은 터번을 두른 황제들과 온몸을 보석으로 감은 황녀의 초상화를 비롯해서 중국, 일본, 스웨덴제 고급 자기들, 문짝만 한 영국 시계들, 이란의 샤 왕조가 바친 보석 투성이의 왕관 모양의 의자와, 투구, 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이 진열된 금은 세공, 보석, 보석, 보석으로 가득한 궁이다.
그런 진열장 옆에는 총기를 든 경찰들이 눈을 부릅뜨고 서 있다. 보물에 비해 그 진열 기술이나 감각은 꽤 후진 감이 있다. 불란서나 스위스 사람들에 게이 물건들을 진열시키라고 했다면 고가로 보이면서 세련되게 정리했을 것이고, 아마 같은 내용물로 박물관 10개쯤은 더 만들어 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마치 여성들이 옷과 장소와 분위기와는 아랑곳없이, 가진 것이라고는 다 걸치고 서 있는 것 같다. 역시 보석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한꺼번에 다 내보이는 것은 결코 좋은 취향이 아니다.
회교국에서는 어떤 왕국에서든지 할렘의 일화들이 많다. 할렘에 드나들며 시중드는 남자들은 모두 흑인으로 대처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 이유는 할렘 여인들이 만약 불륜의 정을 나누었을 때 태어나는 아이들의 피부색깔로 정오(正誤)를 판정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했다. 우리나라 고려, 조선 때 내시들에 대한 비인간적인 귀족들의 처사에 비하면 그래도 인간적인 발상이라고 생각했다.
할렘에는 대기공간이 많으며 여성 숙소답게 화병에 담긴 갖가지 꽃들과 과일 바구니 그림으로 온 벽이 채색되어 있는 곳도 있으며 리셉션 홀에 높이 걸린 거창한 샹데리아와 페르시아 융단이 천정과 벽의 채색을 완벽하게 보완하며 내 키보다 더 큰 유럽 시계와 화병들을 홀의 장식용이기보다 권위로써 존재하는 것 같다.
15세기, 16세기에 모자이크 예술의 절정을 이루어내었다는 그들의 솜씨가 이곳 도처에서 꽃을 피우고 있으며 지붕 덮인 대리석 분수대들이 엄청난 멋을 부리고 있다. 안내자를 따라서 당시 4000여 명의 궁중식 구들의 식사를 해내었다는 가마솥이 수십 개 걸려 있는 부엌에 들어갔을 때와 천상의 사람들이 사는 것같이 깨끗하고 예술적인 공간에서 황제도 하루에 5번씩 기도를 드렸다는 예배실에 들어갔을 때는 마치도 육체적 양식과 정신적 양식의 대비 같은 것을 느꼈다.
톱카프 궁전을 나오면서 프랑스의 19세기 작가이며 아카데미 회원이기까지 한 삐에르 로띠(Pierre Loti)가 해군장교로서 터어키 해군 교육담당으로 이스탄불에 체류했을 때 터어키 처녀와 사랑을 했다는 언덕 위의 작은 카페에 둘러보았다. 온그리스인들이 대대로 사랑하는 터어키의 바이런 격이라 할까. 초라한 터어키 전통 카페에 불과하지만 로띠가 수없이 묘사 하나 이스탄불에 대한 시들과 여인들을 그의 소설에서 많이 셌기 때문이다. 특히 19세기에 터어키 왕실에서는 불어를 가르쳤고 상류사회 전반에 불란서 문화에 대한 선호와 보급이 대단했다고 한다.
떠날 날이 가까워 오면서 나는 서둘러 동양 터어키로 건너 가 세계 제일의 이슬람 묘지 중의 하나라는 꺄라꺄 아흐메트 공동묘지와 온 터어키인들이 입을 모아 찬양하는 시난(Sinan, 1490~1588)이란 건축가의 묘지를 둘러보았다. 그는 일생 동안 80개의 대 회교사원, 50개의 소규모 사원, 수개의 병원, 학교, 교각, 목욕탕을 포함해서 320개의 건물공사를 완성시킨 천재며, 장인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가 누워있는 영원의 집은 그의 빛나는 업적에 비해 너무나 초라해서 나는 슬펐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한 한국인이 이스탄불 곳곳, 당신의 매운 손길에서 얼마나 사랑을 느끼고 감동받고 돌아가는지 모릅니다. 당신의 삶의 모습 하나하나는 생생하게 지금도 우리들의 가슴에 커다란 울림으로 남아 있습니다.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이런 말을 소리 없이 중얼거리며 알 수 없는 정을 느끼며 발길을 돌렸다.
● 아야 소피아 (성 소피아 사원)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 별도 포스팅 예정임
2023.02.06 - [비유럽] - 이스탄불의 성(聖) 소피아성당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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