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門)
문이 언제부터 이 세상에 존재했을까.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인간들의 삶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생겼으리라고 믿는다. 문이 없는 인간 생활이 있었던가? 그러고 보면 문이란 인간만이 지닌 것이다. 새들은 둥지가 있으나 문이 없고, 야수들도 은신처가 있으나 문은 없다. 인간 이외에 문이 있는 삶을 본 적이 있는가.
바로 인생과 더불어 있어 주는 문, 그것은 보호와 휴식, 평화, 희망, 기쁨과 슬픔, 질투와 인고, 꿈과 명상, 좌절, 그리고 너와 나 이 모든 것들이 만나고 오가는 그런 공간이다. 거적문, 싸리문, 대문, 수문, 옥문, 성문, 관문, 입학문, 좁은문, 지옥문 등 그 크기, 형태, 용도, 상상, 가치는 실로 다양하다. 종족과 문화, 문명을 떠나서 어디서나 존재하는 문,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문이란 것만큼 이중적 효과가 공정한 것도 드물 것이다. 문은 여닫는다는 두 개의 개념을 가지고 존재한다. 즉 열릴 때 열리고, 닫힐 때 닫힐 수 있어야 제구실을 다하는 것이다. 문은 지극히 중립적인 좌표축을 가지나, 그 역할은 양 극단을 왕래함으로써 그 소임을 다한다. 나는 현상으로서의 문에서보다 '현상의 문을 인식하는 각 인간 내면의 문'에 늘 관심을 쏟아 왔다.
그러면 나의 '내면의 문', 우리의 '인식의 문'은 과연 제구실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 우리는 흔히 동양인과 서구인의 의식 구조를 말할 때 닫힌 세계와 열린 세계로 표현하는 것을 자주 듣게 되고, 인간을 평할 때도 “저 사람은 너무 닫혔어, 또 이 사람은 시원하게 탁 트였어" 이런 표현들을 들게 된다.
이는 반드시 열린 것이 미덕이고가치이며, 닫힌 것은 악이고 열등한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필요할 때 열리고 닫히고 하는 제구실이 우리 의식 속에서 잘 이루어지고 있는가 한 번쯤 살펴볼 일이다.
보통 사람들은 인식의 문에 시간의 축을 대입하여 어제, 오늘, 내일이라는 판에 박힌 시간 개념 속에 매일을 살아가나 프루스트나 조이스 같은 시간의 천재들은 예술에 도달하고자 하는 우회적인 방법으로 무의식을 추구하여 시간을 멋있게 요리해 나간다.
그리고 종교인이나 예술가도 내면의 문을 열어 시간을 영원으로 열어 나간다. 모든 사건이나 사물 앞에서 내면의 문을 여는 일에 일반적으로 우리는 인색한 것 같다. 거기에는 역사적인 이유가 많이 있다.
외침(外侵), 좀스런 도덕관, 그 야단스럽던 궁중 혹은 양반 법도, 아녀자에 대한 과잉보호 의식, 유교 율법… 이런 것들이 한국인으로 하여금 문을 여는 데에 주저하고 소심하게 만들어 마침내는 정신문화 폐쇄 현상을 이루어 놓고 말았다. “춥다, 문을 닫아라”, “문을 잘 잠가라”, “아무에게나 문을 열면 안 돼” 등 이런 말을 귀가 닳도록 들어온 어린아이들에게 이젠 문이란 항상 닫는 것으로 무의식 속에 고정되어 버린 듯하다.
그러나 문에는 50퍼센트의 연다는 역할이 있다. 개방한다는 말은 누구와 더불어 사는 첩경이 되고 자연과 세계와의 친화력을 시사해 주며, 깊고 넓은 폭과 더불어 자유와 희망, 그리고 로망이 펼쳐지는 길이다. 조심스럽게 폐쇄해서 얻는 것보다, 시기상조이며 다소의 모험이 따른다고 하더라도 개방하여 얻는 것이 긴 안목으로 본다면 실리면에서 보다 바람직할 것이다.
현재를 성실하게 살며 실력 있는 자의 삶은, 문을 열 줄 아는 여유와 멋을 누릴 수 있게 마련이다. 정부와 국민, 교수와 학생, 가진 자와 없는 자…, 우리는 쉴 새 없이 대화할 줄 알아야 한다. 문을 열고 손님을 맞을 줄도 알아야 한다. 손님과 친구가 자주 오는 집은 대개 깨끗하고 잘 정리 정돈되어 있는 법이다.
공동 목적으로 두 사람 이상이 모인 집단에는 의견을 교환하는 회의도 필요하다(물론 이북 공산당원들이 하는 강요된 부정적인 회의 같은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이 모든 일들이 생활의 활력소를 주는 문이 열려 있는 세계의 긍정적인 면이다. 조화롭고, 지혜로운 문의 작동은 바로 격이 높은 문화의 척도가 된다.
우리가 ‘인식의 문’을 열고 정담을 나누며, 인간 사이의 오해나 절박한 문제들을 함께 풀어가고 인습적인 것에서 창조적인 삶으로 옮아갈 때, 우리는 참으로 진실이란 아름다움 앞에 서게 된다.
이제 우리도 피해 의식 없이 정당하게 문을 여는 법을 배워야한다. 새로운 공기로 숨 쉬며 바깥세상을 보기 위해서 창호지를 침으로 뚫어댔던 시대, 혹은 아파트 문의 눈동자만 빼꼼히 내다 보이는 유리를 통해서 보는 닫힌 상태에서, 혹은 잠복 상태의 근시적이고 소극적인 방법에서 탈피하여 밝고 넓은 세계에 발 디디기 위해서 문을 활짝 열어 보면 어떨까.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