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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外

하마메트 (Hammamet) 기행, 북아프리카 튀니지

by 이다인 2023.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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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메트 (Hammamet) 기행, 북 아프리카 튀니지

 
튀니지는 북 아프리카 세 나라 중에서 거의 75년(1981~1956) 간 프랑스 식민지로 있었기에 공식어가 아랍어이긴 하나 많은 사람들이 불어를 안다.
 
75년간 이라고는 했지만 프랑스가 이 땅을 탐내기는 벌써 16세기부터 영국, 이태리와 함께 주변을 맴돌며,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던 셈이다. 튀니지가 프랑스로 넘어갔던 것이 가장 억울했던 나라는 역시 이태리가 아닐까 생각되는 것은 시실리 섬에서 140km 밖에 되지 않는 아주 가까운 거리라는 점이다.
 
나는 튀니지에 대해서 벌써 오래전부터 많은 호기심과 관심을 가졌고, 여러 문화적인 면들을 알고 있었으나 번번이 기회를 놓치다가 더 늦기 전에 어렵게 기회를 만들었다.
 
하마메트는 지중해 연안의 작은 에메랄드 같은 보석처럼 아름다운 해변 휴양도시다. 나는 책을 통해 그 풍경은 이미 짐작했지만, 금모래와 물빛깔이 그토록 무공해 상태인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에메랄드 보석처럼 아름다운 해변 휴양도시 하마메트
에메랄드 보석처럼 아름다운 해변 휴양도시 하마메트

 
이미 1881년도에 그 유명한 천재 단편 작가 모파상 (Guy de Maupassan)이 유럽에 낙원으로 소개한 이래로 1930년대 다시 Georges SebastianJean & Violet Henson이라는 미국의 거부에 의해서 특별한 관심을 가지게 된 이래로 전 세계의 예술가들과 작가들에 의해서 재조명되기 시작했던 곳이다.
 
만 레이, 콜레맥끄, 자코메티, 지드, 베르나소스, 그리고 롬멜이 말년에 거기에 살았고, 처칠 경이 그의 회상록을 거기서 썼다고 한다. 1960년대부터는 정치가, 외교관, 배우등을 비롯한 이렇다 하는 상류사회 인물들의 휴가와 만남의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언제나 세상에서 숨겨졌던 아름다운 곳들은 작가나 예술가들의 눈에 띄어 유명해졌던 곳들이 많다. 나만 하더라도 모파상이니 끌레니 지드니 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들먹거려졌기에 호기심이 더 생겼는지도 모른다.
 
수도 튀니스의 Carthage 카르타고 국제 비행장에 내리기까지 니스에서 침대차로 이른 아침, 로마 종착역에 도착했다. 너무나 오랜만에 탔던 밤열차행이었기 때문에, 그날 나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상기되어 있었다.
 
비록 보름달은 아니어도 우윳빛으로 흘러내리는 달빛 아래, 온 세계가 어슴프레 형태만 보이듯 말 듯했다. 남국 특유의 우산 소나무들, 불 밝힌 수많은 작은 해변 집들, 토스칸의 잠들고 있는 검은 바다, 어느 것 하나 빼놓을 수 없이 감미롭고 평화스러웠다.
 
더구나 그런 풍경을 오랫동안 물끄러미 내다보며 담배를 물고서, 복도 창가에 서있던 한 남자의 모습은 그 풍경과 그 시간에 절묘하게 어울리는 몸짓을 하고 있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모든 일상의 궤도에서 이탈하고 있는 해방감과 불안감, 초로의 아련한 슬픔과 허탈감 혹은 알알이 살아온 자신의 삶을 반추하거나 아니면 두고 온 일터의 잡다한 일들과 미묘한 사람들과의 관계 혹은 그리움 같은 것을 나처럼 생각하고 있었을까.
 
일상을 떠난 그런 특수한 공간에서는 차라리 논리적인 언어들이나 몸짓보다는 가벼운 침묵이나 서투른 대화, 혹은 눌변으로 깔려있는 감각의 세계가 더 정확한 지름길인지 모른다.
 
로마에서 튀니스까지는 물론 소형 비행기였으며 가무스름한 아랍 얼굴들이 많이 탔다. 1시간도 채 안 되는 거리였던 것 같다. 튀니지는 그 옛날 기원전 로마 제국에 맞서 승리했던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의 숨결이 느껴지는 곳이다. 국제 비행장 치고는 말쑥하고 정돈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우선 하마메트까지 가는 교통편 때문에 시간을 좀 끌어서 짜증스러웠지만 곧 적당한 가격의 자동차로 갈 수 있었다. 마음 좋아 보이며 말솜씨로 떠들어대는 그 운전기사는 자기 차가 벤츠라고 우쭐대며 자랑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는데 족히 10 수년 이상은 굴렀을 것 같은 덜렁덜렁한 고물차여서 우리는 속으로 웃었다.
 
고속도로로 들어가기 전 즐비한 집들은 전혀 예쁘지 않았고 한국 60~70년대 중반쯤의 풍경이었다. 여기저기 건축 중인 곳이 많이 눈에 띄었다. 차창으로 들어오는 먼지바람은 코를 매콤하게 했다. 간간이 꾸부러지고 비틀어진 올리브 나무들이 도열해 있는 곳이 눈에 띄는 것을 보니 비가 엄청 적은 곳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거의 두 시간 만에 당도한 곳이 바로 해변가에 예약해 둔 순수 튀니지 기업이 운영하는 호텔이었다. 내장이나 소품 문양들이 아랍 냄새가 물씬하고 이국적이었다. 국제 관광객들을 받아들이기에 손색없이 모든 시설을 갖추고 있었고 사람들도 친절하였다.
 
하마메트의 진가는 관광 건설 붐이 시작될 때부터 시멘트 건축 밀물을 경계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많은 호텔이 해변에 들어서 있었지만, 여유롭게 미풍을 타고 노니는 남국의 상징인 종려나무 키 높이를 능가하지는 않았다.

 

하마메트 정경
하마메트 정경


또한 평화롭게 낮잠을 즐기는듯한 옅은 색조의 아름다운 건물만을 지었다는 점이다. 작고 혹은 넓은 호텔들은 지중해의 물결을 배경으로 하는 한 폭의 수채화다. 발코니가 제법 넓은 해변가 방인데 특징은 로마나 파리의 것들에 비해 두 배쯤은 크고 확 트여 있었다.

 


 
가방을 풀기도 전에 누가 노크를 했다. 들어온 사람은 전통 옷을 걸친 한 美人이었는데 꽃이 꼽힌 화병을 방에 옮겨놓으면서 즐거운 체류를 하기를 바란다고 하며 불편이 있으면 자기에게 연락하라는 인사를 하고 나갔다.
 
아마 룸 서비스 하는 책임자쯤 되는 여성인 것 같았다. 발코니를 통해서 내려다 보이는 푸른 바다와 저 아래 수영장 주변에는 벌써 유럽인들이 포진을 하고 있었다. 모래사장에는 독어, 불어, 이태리어, 영어가 자유롭게 굴러다닌다. 본토인들인 잡상인들까지도 여러 외국어를 자유자재로 하며 흥정을 하고 있었다.

 

하마메트 해변

나는 여기까지 해변만을 즐기러 온 여유로운 사람은 아니다. 반드시 보고 갈 것이 있다. 로마인들이 2세기에 들어왔을 때 이미 융숭한 文化적 꽃을 피웠다는 수도에서 내부 100km 지점에 있는 로마인들의 유적인 3500 석이 있고 아름다운 코린트 식 주랑이 서있다는 야외극장과 카피톨리니 사원 등이 몹시 보고 싶었지만, 아프리카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이슬람 사원의 센터라는 Kairouan 성시(聖巿)를 선택하기로 했다.
 

여정 행로
여정 행로

 

자동차로 거의 한 시간 반쯤 달려왔다. 오는 도중 올리브 밭들과 양치는 곳들이 많이 보였고, 습기라고는 없는 거의 반 사막지대로 가는 것 같았다. 원래 유목민들에 의해서 시작된 땅이긴 하지만 "Kairouan" 이라는 이 지역이름이 카라반이란 뜻이라고 했다.
 
입구에는 꽤 규모 있는 관광 사무소가 있었고, 거기서 입장권을 사야 했다. 보존된 유적들 가운데 Aghlabides 못이라고 부르는 빗물받이로 쓰이는 큰 웅덩이가 신기로웠다. 그것은 9세기에 만들어졌고 주변 야산에서부터 35km나 되는 수로를 만들어서 물을 저장했다는 것이다. 대단한 지혜였다고 느꼈다.
 
아랍인들의 타일재로 된 모자이크 기법은 예술 그 자체의 경지임이 여러 곳에서 증명되었지만, 여기의 Barbier사원의 벽, 천장, 바닥들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크게 놀라게 되어있다. 어찌 그렇게 정교하고 하나 비틀어짐이 없이 과 형, 선 모두를 그렇게 완벽하게 만들었는지 정말 대단한 선조들을 가졌다.
 
또 대사원의 웅장함과 위엄은 벽채와 문에서 찾을 수 있으며 대리석으로 입혀진 안뜰과 주랑 그리고 천년이나 사용했다는 닳고 닳은 7개의 우물을 신비스러운 마음으로 봐야 했다.
 

특히 사원에 들어가기 전에는 반드시 큰 자루 같은 흰 무명옷을 입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었다. 물론 돈을 지불하고 빌려서 입었지만 우리 모습들이 참 우스웠다. 샅샅이 주의 깊게 보려면 온종일 있어야 하겠지만, 퇴장 시간에 걸려 대충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들. 선조들이 살고 간 값진 시간과 공간을 음미해 보는 좋은 기회가 되어서 흐뭇했다.
 

어디를 가나 아랍국에서는 관광객들에게 융단을 팔기에 열을 올린다. 우리는 모자이크로 꾸민 한 아담한 이층 집을 방문했다. 당시 그 도시 최고 권력자가 둘째 부인과 같이 살던 집이라 했다. 지금은 어떤 영문인지 손님들에게 엽차도 대접하는 고급 융단 쇼룸으로 쓰고 있었다.

 

 

이렇게 건장한 매장의 남자들이 몇이나 있는 것을 보니 여기 와서 사가지고 가는 사람들이 많은가 보다고 생각했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골목길을 빠져나오면 여인들이 베틀을 놓고 실과 손놀림을 열심히 하며 융단 짜는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별 기대 없이 한가롭게 이들의 사는 진면목을 보고 싶으면 거리 여기저기를 기웃거려 보는 것이 재미있다.
 

지저분하고 아직도 흰 차도르 (chador)를쓰고 다니는 여인을 보고 있으면 여성들의 육체가 무엇이길래 동양에서는 저토록 가리길 원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Kairouan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기분은 마치 중세시대에 갔다가 되돌아오는 것 같았다. 그런 훌륭한 문화적 유산을 보는데도 그리 명쾌한 기분이 아님은 웬일일까.
 
여정이 짧아 유감이지만, 하루를 내어서 숙소에서 15km 떨어진 도자기 도시라는 Nabeul을 들러보기로 한 것은 다행이었다. 우선 그 지역 행정 중심 도시답게 국기가 달린 우체국도, 사거리도 가게들도 촌스럽긴 하지만 우두커니 서서 잘 버티어 주었다.
 
100여 개 이태리 Faience 채색기술과 스페인 안달루시아의 피난민들에게 배운 청, 록, 황의 강한 가장자리 무늬와 실편백과 꽃들을 전통적 방법으로 그려 넣은 것들은 이 도자기의 특징이었다.
 
특히 향로, 그릇, 의자, 화병, 물항아리 등 너무나 아름다운 이들의 예술적 소절에 나는 감동했다. 이런 섬세한 일에 열중하는 일은 이 더위를 견디기에 안성맞춤이라고까지 생각해 보았다.
 
우선 보기에는 파리나 서울 같은 문명의 활발한 재미가 배제된 곳에서 도예 예술이 생겨나는 것이 당연하다고 느꼈다. 우선 시멘트 문화에서 떨어져야 하는 흙의 문화, 자연과의 친화, 기계, 공장, 대량생산 등의 개념과는 먼 도예 정신, 손길만이 이런 아름다움을 창조해 낼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Nabeul에서 몇 개 작은 접시와 예쁜 과반 하나를 사고 행복했다. 도자기들이 쌓여 있는 가게 앞에서 찍은 사진 한 장에서 나는 지금도 그들 도공의 땀 흘림을 느끼고 과반을 모셔놓고 가끔 행복하게 사용한다.
 

유학 시절 같은 기숙사 한 튀니지 친구가 그렇게 자랑했던 물빛, 하얀 도자기, 선정적이기까지 한 그들 춤이 어떤 것이었나 이제는 감이 많이 잡혔다. 무엇이든지 자신이 느끼고 보아야 한다.
 


 

카르타고-유적지휴양지-사진
카르타고 의 옛유적  /  휴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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