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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에세이

그림은 나의 개인 언어

by 이다인 2023.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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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나의 개인 언어

 

미술은 나에게 꾸밈없이, 순수하게 나 자신 그대로를, 독특한 분위기를 통해 표출하며 나 자신의 미적 감성 세계를 탐구하며, 인간적 유대를 향해 끊임없는 정직한 대화를 추구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나는 생리적으로 예술을 사랑한다. 글을 쓰고 음악을 듣고 그림을 그리는 일은 바로 나의 생활이다. 

 

그림을 그리다가 나의 재능에 대한 한계점을 느끼면 씁쓸한 불행감을 맛보기도 하지만 화폭에 나 스스로가 완전히 몰입되면 그지없이 행복감을 느낀다. 음악, , 그림, 이런 것들은 서로 국경이 분명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무경계 상태이며 서로 상부상조한다.

 

가령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를 듣고 있으면 북구의 백야를 그리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끼게 되고 설경의 시를 노래하고 싶어 진다. 이렇듯 소위 교감 (correspondence)이 내 속에서 메아리치는 것이다. 음과 색과 시가 함께 형제처럼 공존하면서 나라는 개성을 만들고 있다. 국전이니 콩쿠르 혹은 시인, 화가라는 호칭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으며 그런 것은 적어도 나의 관심 밖의 일들이다. 예술에의 나의 집착은 오직 나 개인적인 열정이며 나의 개인적인 표현 욕구이며 나의 개인'언어'의 세계다.

 

나는 나의 개인 '언어'를 깊고 폭넓게 탐구하며 나의 모든 일상에 이르기까지 확산시키고 싶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내' ' 전체가 아름답고 윤기 흐르는 풍요 속에 머물게 하고 싶다는 얘기다. 특히 인간관계에서 적어도 내가 몹시 사랑하는 사람은 저질스러운 세속적인 물질문명에 오염되지 않도록 지키고 싶다. 조각을 빚듯이 조심스럽게 정성을 다하여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어가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용한 늪에 고이는 물처럼 살 수 없다. 부단히 젊게, 정신과 육체를 움직이며 흐르는 물처럼 맑아지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래서 나는 자주 여행을 떠난다. 특히 내가 사는 곳과는 다른 풍속도를 느끼게 되면 내 모든 호기심의 촉각이 충족되면서 갑자기 오염으로 찌든 내가 정화되는 기쁨을 느끼면서 신선한 호흡과 날개가 돋아 비상의 가벼움을 느끼게 된다. 일상의 틀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이방인이 된 나의 발걸음은 자주 세계 여러 나라의 미술관으로 향한다. 

 

예를 들면 지난여름, 대만 고궁 박물관 방문 같은 것은 내가 동양인이면서 서양 문물에 관심이 급급하다 보니 이런저런 이유로 오랫동안 뒤로 미루었던 중국에 관한 관심에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한 동기가 되었다. 그 많은 옛날 중국인들의 신출귀몰한 솜씨에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많은 보물을 대륙으로부터 싣고 올 수 있었던 장개석 총통의 예술 관심에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거창하게 건립되어 있던 건물 안 기념상 앞에서 코가 땅에 닿을 듯 절을 하고 있었던 중국 남녀들의 존경심을 이해할 만하다.

 

대만은 아름답지도 깨끗하지도 않아 별 흥미 없는 도시지만, 다시 갈 기회에 나는 또 그 박물관을 찾을 것이다. 3개월마다 박물관의 내용이 많이 바뀐다고 하니 그들의 보고는 도대체 얼마만큼이나 된다는 얘긴가. 미술품을 돌아보고 있는데 단체관광객들이 많이 오가고 한다. 내 눈짐작으로 거의 60~70%가 한국인이 아닌가 싶었다. 한국 안내원은 일본이나 중국 안내원들보다 유난히 크고 목쉰 소리로 설명하는 것까지는 하는 수 없었던 일이라 하고 왜 그렇게 떠들며 입으로 감상을 해야 하는지 정말 얼굴이 뜨거울 지경이었다. 제발 미술관 관광만큼은 조용히 해주기를 당부하고 싶은 심정이다.

 

홍콩은 고층 빌딩과 현대 문명의 최첨단이기를 사용하는 국제 인간들이 많이 살고 있지만, 그것은 소비문화 도시일 뿐인 데 비해 비록 추진 분위기였지만 대만은 박물관 하나만으로도 고도의 문화가 축적된 도시로 생각되었다. 개인이나 집단은 다 마찬가지지만 현재 물질적으로 가진 그것이 많고 적고를 놓고 평가하는 수치적 방법은 문화의 척도를 가늠할 때만은 적합하지 않다. 예를 들면 이탈리아의 GNP가 일본 것에 못 미친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축적하고 있는 문화성까지 수치로 계산하면 국민 수준은 이탈리아가 훨씬 높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어떤 집을 방문할 때 그 집 벽면에 걸린 그림 하나만 보고도 가족들의 취향과 수준을 대강 평가할 수 있는 기술(?)이 있다. 그림은 화가의 수준도 나타내지만, 소유자의 취향이나 수준을 평가하는 척도가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예술적 안목은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쉴 새 없이 생활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할 때만 비로소 그것이 주어지는 것이다.

 

나는 '예술적', '예술가적'이란 말을 대단히 좋아한다. '예술가', '예술작품'이란 말을 쓰고 나면 무엇인가 이미 끝나버린 완성된 상태, 그리고 생동감이 약화하여 화석화되어 버린 그것 같아 매력이 상실된다. 예술이란 영원히 숨을 쉬고 있고 생명력과 격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대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완료의 상태가 아닌 영원한 진행으로 존재해 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나의 소망에서 '예술적', '예술가적'이라는 미완성의 뜻을 수용하는 표현을 나는 더 좋아한다.

 

미술은 나의 영원한 ''이다. 현실과 꿈이란 것이 무엇인가를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꿈이란 원래 밤의 환상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낮에 꾸는 몽상까지도 허황하고 비생산적이고 비논리적이며 시작도 끝도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일단 꿈을 희망이라는 미래성 시간과 결부해서 생각하는 순간부터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인간의 삶에서 꿈을 배제하면 정신이 질식 상태에 이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얼마 전 한 친구와 내 집에서 식사한 적이 있다. 나는 식탁을 준비하면서 빛깔이 고운 초를 골라 불을 켰다. 소위 우아한 '촛불잔치'를 한 셈이다. 여러 사람이 촛불 미학에 언급한 적이 많지만 나는 그런 효과를 겨냥해서가 아니라 때때로 위협적이기까지 한 백열등의 너무 밝음에 이상한 심리적인 부담을 느낄 때가 있어 감미롭고 조용하고 싶은 시간을 가지려 할 때는 흐늘거리고 어슴푸레한 촛불 밑에서 음악을 듣고 식사를 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여행 중 어느 나라 어느 곳에서든지 예쁜 초 몇 자루씩 사는 버릇이 있다. 아마 나는 보기 싫고 미운 사람과 같이 있어야 하는 시간에는 형광등을 켤 것 같다.

 

이처럼 매일 사용하는 빛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심리란 묘한 것이어서 시시각각으로 어떤 형태로든 자기 내면을 표현하는 법이다. 나에게 전깃불과 촛불은 현실의 빛과 꿈의 빛으로 구별되면서 나의 구체적인 생활 감정 표현으로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촛불에 대한 나의 인식은 바로 ''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며 나의 미적 감성에 호소한 것이다. 정확한 영상인 사진과 다른 그림, 밝디 밝은 전깃불이 미치지 못하는 촛불의 정서, 분명하고 생산적인 현실이 채워주지 못하는 꿈의 세계, 이런 선호를 할 수 있는 인간의 취향이 하등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특징이다.

 

나는 나의 미술 행위를 통해서 잡다한 일상 감정이 순화됨을 실감한다. 그래서 미술은 내 정신생활의 여과기 몫을 담당하고 있어 내 신체의 간장처럼 중요하다. 물감을 개어 화판에 바르고 또 명암 원근을 배려하여 재료의 질감을 연구하여 결합하고 해체하는 작업은 바로 열달 임신 기간의 과정과 흡사하여 마지막 붓을 놓고 '작품'이란 생명체의 탄생 기쁨을 맞는 순간은 몸을 푸는 젊은 여인의 행복 같은 그것이 된다. 그림이 마르고 완성되면 나의 까다로움을 귀찮아하지 않고 장인 같은 손재주로 액자를 완성하여 끼워주는 화방 주인에게서 그림을 받아와서 그 그림에 맞는 분위기의 벽에 걸어놓고 바라보고 있으면 내 가슴은 기쁨으로 충만하다.

 

나의 그림이 나의 '개인 언어' 라면 소유자는 대화자가 된다. 작가와 작품 소유자나 감상자는 발신자와 수신자의 관계가 성립되기 때문에 두 쪽의 지적, 문화적, 감성적 수준이 비등해야 이상적이다. 발신자가 아무리 좋은 목소리를 보내어도 수신자가 이해 불능이라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나를 비롯하여 내 주변, 내 시대의 모든 사람이 '예술적'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

 

예술 행위란 것이 잉여 감정 유희나 고급 취향을 위한 상품 제작이 아니며, 손익계산 없는 진실하고 순수한 자유로운 인간 영혼의 표현이기 때문에 가령 정치인이 예술적으로 정치를 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국민에게 진실이 전달되어 어느 날 멀리 귀양살이까지 갈 위험이 전혀 없을 것이며 온 국민에게서 존경받을 것이다.

 

또 거부들이 예술적으로 되면 세련되고 수준 높은 정신문화에 크게 이바지할 것이고 군인이 예술적으로 되면 전쟁은 짧게, 평화를 길게 탄탄하게 지킬 것이다. 정치, 군사, 경제 그리고 모든 인간관계까지 예술적 수준을 지향한다면 바로 우리가 그토록 염원하는 정당한 인간성 회복과 행복이 거기에 있지 않을까. 세상에는 자기 직업 이외에 그림이라는 세계의 탐구에 미친 사람들이 많다. 그들의 인생은 얼마나 멋있고 성공적인 인생인가. 이상의 이유들 만으로도 나는 '예술적'이라는 이 형용사를 대단히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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