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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에세이

촛불

by 이다인 2023.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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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서서히 익어갈 때 지평선 위에 붉은빛을 드리우고 떠나는 마지막 태양을 넓은 평원 멀리서 바라보는 목가적 풍경 앞에 서 보았을 때 나는 이상한 경이로움을 느낀다.

 

이제 주로 바쁜 도시에만 사는데 길들어버린 나는 그런 일들은 아득한 향수로 남을 뿐이고 그런 풍경의 접근은 특별한 시간을 내어 호젓한 시골을 찾아가야 하며 무슨 사치로까지 생각해 버리게 되었다. 잡다한 의무는 많고 마음은 찌들어 오고 내 존재가치가 상실되어 간다는 생각이 들면 갑자기 당황해지면서 나는 더욱 그런 지평선의 풍경을 그리워하게 된다.

 

며칠 전 나는 서울 어느 높은 건물상층에서 오랜만에 다정한 두 친구와 식사를 한 적이 있다. 서울이 거의 다 내다보였다. 비록 망망대해나 넓은 평원에서 느끼는 것은 아니지만 창 밖의 확 트인 공간 앞에 마치 오랫동안 눌린 자가 모든 멍에를 벗어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 잔잔한 희열로서 내게 일종의 메시지를 전해오는 것 같았다.

 

저녁 7시경이었다. 낮의 그 분란했던 서울이 검은 연기로 피어오르면서 구석구석 검게 물들어 오고 있었다. 벌써 창과 기둥의 불빛이 서서히 빛을 발하고 하늘의 별들도 하나하나 대지에 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다. 높은 곳에서 보고 있는 나는 땅과 하늘이 은밀한 언어를 교신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날 저녁, 나는 축제가 벌어지는 밤하늘에 산화되는 불꽃으로 시작해서 어느 촌부가 늦은 가을 마지막 추수를 끝내고 돌아올 남편을 기다리며 불 밝혀 놓은 초가삼간의 불빛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불빛이 한 덩어리 되어 한꺼번에 내 머릿속에 확산되었던 것 같다. 그렇다. 원래 촛불이란 하강하지 않고 하늘로 치솟는다. 그리고 일단 붉은 것으로 생각한다.

 

전광이나 태양은 하강하는 빛이며 군림하는 빛이다. 너무 밝아 눈부시게 하며 마침내 실명(失明)의 빛으로 되기 일쑤이나 촛불은 어두운 듯 밝아 눈 뜨게 하는 빛이며 신비감을 자아내고 모든 사물의 약점마저 덮어주는 누이며, 어머니며, 연인 같은 너그럽고, 아름답고, 부드러운 빛이다. 실은 강한 빛을 내는 불은 파랗고, 하얗고, 노랗기까지 하다. 뭐니 뭐니 해도 불의 원형은 태양이며 천둥번개다. 그런 막강한 힘을 과시하는 불과 빛과는 거리가 먼 스스로를 태우는 촛불의 진솔한 아름다움에 나는 늘 마음을 빼앗긴다.

 

고층식당에서 저녁을 먹던 그날 밤도 촛불이 밝혀진 식탁분위기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당당하다 못해 일종의 위협까지 느끼게 하는 정오의 태양빛 아래서 가지는 기분과는 달리 꺼질세라 춤추며 어른거리며 다가오는 촛불의 정감은 못내 그리워하는 얼굴이 거기 있는 것만 같아 더욱 좋다. 한줄기 가느다란 바람만 불어도 꺼져버릴 위험한 운명을 타고나서도 애틋한 빛으로 인간들의 상처와 외로움을 쓸어안아 주는 것 같다. 촛불은 동서 대소국을 막론하고 인간들의 중요한 행사에 나타난다.

 

화려하고 우아한 결혼식장과 슬프고 불행한 죽음의 장소에도 존재한다. 옛날 아낙네들이 정한수 떠놓고 비는 상위에도 놓인다. 과학시대 인간들의 모든 의식에서 무속에이르기까지 촛불을 등장시킨다. 촛불은 생()과 사(死) 사이에(死) 모든 중요한 일에 쓰이는 불이다. 촛불이 인간에게 심상치 않게 쓰이는 의미가 어디에 있을까. 바로 꿈, 고독, 명상, 독서, (), 기도, 축제, 사랑... 들과 깊은 혈연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훤한 전깃불 아래서 이상의 것들을 멋있게 실현하기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 나는 형형색색의 초에 불을 켜고 사색에 잠기거나 원고 쓰기를 좋아한다. 그것은 낙원적 인내 시간의 사치인지도 모른다. 그런 가운데 격의 없는 친구와 대화를 한다든가,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면 잡다한 현실, 물질문명의 살벌하고 위협적인 많은 것들은 물러가고 구제의 시간이 이루어진다.

 

매일을 살면서 구원의 시간과 공간, 구원의 여인과 남성이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을 사랑이라 해두자. 그런 것은 공기와 같은 것이라 그것 없이는 단 한 시간이라도 살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철저하게 자기를 사랑하는 일만이 남을 사랑할 여유를 얻는다는 것도 안다. 타인을 아름답게 사랑하기 위해서 나는 내 생활을 엄격하게 사랑하는 방법을 택할 것이다.

 

돌 건축으로 소음을 제거하고 포근한 양탄자와 아름다운 그림, 고급 가구가 우아하게 채워진 실내를 밝히는 촛불도 아름답지만 옛날 농가의 호롱불의 정경도 어린 시절 기억에 남아 있는 아름다운 불의 이미지다. 오늘의 인간들은 백열등, 형광등, 할로겐까지 고안해내고 있다. 6.25 전쟁 뒤에 많이 사용했던 형광등을 일컬어 나는 '죽은 불'이라고' 명명한다. 그 빛은 어쩐지 지옥으로 유인하는 빛 같다.

 

그래서 나는 이사를 가면 그 집에 붙어있는 형광등을 떼내는 일부터 시작한다. 나의 형광등을 혐오하는 것은 그 빛이 인간의 모습에서 피와 살을 훑어내고 뼈만 남게 하는 영상효과를 남기는데 기인된다. 유연성과 자연성에서 견고성으로 사물을 바꾸어 놓는다. 빛까지도 부드러운 것과 딱딱한 것이 있는데 하물며 인간이야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나는 번쩍번쩍 능력 있는 사람들 중에 형광등 같은 느낌을 받는 사람을 가끔 만나게 되면 안타깝다 못해 괜히 씁쓸하여 내 마음을 슬그머니 잠가버리는 버릇이 있다. 촛불을 켜놓은 실내의 벽에 넘실거리는 빛 무리는 성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성인들의 후광을 닮아 더욱 좋다. 나이가 든 지금도 창 너머 영롱한 별빛과 대지의 아련한 촛불이 정겹게 만나는 밤이면 가슴 설레는 경험을 하는 것을 보아 나는 영원히 철들기 어려운 구제 불능아인가 보다.

 

 

 

Dah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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