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일기
3월은 차갑고 두꺼운 지층을 소리 없이 뚫고 온 생명을 다시 내보내 주어 고마운 달이다. 그런 축복의 달에 태어난 나는 3월은 언제나 '만남'의 달로 생각될 때가 많다. 그리고 오랜 학교생활을 통해서 늘 3월에 새로운 얼굴들을 만나 왔다. 그래서 신학기가 되면 잔잔한 설렘이 일었고 희망 같은 것이 내 속에 은근히 깔려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번 겨울에는 이런저런 병치레를 하느라고 참으로 우울했고 외로움을 몹시 탔다. 구름 낀 날씨처럼 기분도 상쾌하지 않았고 3월 초에는 더구나 병원 신세까지 졌다. 극진히 보살펴 주었던 주변 때문에 영혼은 춥지 않았다. 그들의 마음 씀씀이를 반추하듯 되씹으며 싸늘한 병원 침대 위에서나마 나는 행복한 몽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전혀 현실성 없는 그 모든 것들을 다 생각해 보았던 것 같다. 차라리 현실성 없는 것들을 생각해 보는 것은 감미로울 수 있어서 좋았다. 윤기 도는 아름다움이 존재해 주는 것 같아서 마음대로 허상을 설정해 보는 것이 즐거웠다. 그리고 내 옆에 부재하는 신을 초대해 보기도 했다. 그런 몽상을 하고 있으면 천만명 이상의 영상이 허우적거리는 서울이란 거대한 동물 같은 대도시의 아침도 병실 창가에 묻어올 때는 양처럼 양순하다. 빛의 숨결이 내 귓전에 다가서면서 충만한 아침을 예고한다.
내 시선은 서서히 흰 천정에서 벽을 타고 내려 병실 창가에 놓인 꽃이나 과일 바구니에서 멈춘다. 그러면 나 혼자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나는 여전히 누구와 같이 있다는 작은 환희를 느끼게 된다. 혼자 있는 것도 좋지만 더불어 있는 것도 좋다. '하나는 적고 둘은 많고'라는 묘한 숫자에 대한 갈등 때문에 우리는 생활의 우(愚)를 범하기도 하고 희극을, 비극을 만들기도 한다. 병실 복도에 발소리가 많이 나기 시작하면 나의 행복한 새벽 몽상은 끝난다.
사람들이 온다. 친구가 온다. 나에게는 ‘춘’이라는 친구가 있다. 그는 내가 갖지 못한 성품과 재주를 모두 지닌 여자다. 내가 해낼 수 없는 현실적인 여러 문제를 놀랍게 풀어내는 능력을 타고났다. 나는 언제나 놀라움과 찬사의 눈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특히 그녀의 재담은 주변 사람들을 모두 유쾌하게, 즐겁게 만든다. 매일 병문안 전화를 해오던 한 친구는 하루 전화를 하지 않았다. 다음날 전화가 왔다. 나의 보호자로 병실에 와 있던 춘이 내 옆에서 수화기를 들었다. 그들의 대화는 다음과 같았다. “이 교수 오늘은 열 좀 내렸어?"... "너 믿고 이 교수가 어떻게 아프겠니?" 이것은 하루 전화 없었던 것에 대한 나무람 내지 핀잔이었으나 상대방은 화는커녕 통쾌하게 웃어대지 않을 수 없었다.
또 한 친구가 보내 준 과일 바구니 앞에서 “이 교수 그만 아프고 이제 오늘부터 내가 아플래"라는 이 말에 나는 옆에서 폭소를 터뜨렸다. 그때 나는 언어에 대한 묘미를 생각하고 있었다. 언어가 인간의 특권인데, 그 특권을 최대로 누리고 사는 여성을 그때 본 것 같았다. 가끔 나는 외국어가 존재하지 않고, 사투리가, 은어가 없으면 얼마나 세상이 단조롭고 재미없을까를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춘'이 하고 있는 '굴절 언어 표현'에 나는 반했다. 아마 내가 전화를 받았다면, “매일 전화 걸어 주어 고마워", 또는 "과일 보내주어 고마워. 잘 먹겠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춘은 재기 넘치는 언어로 내 병원 생활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약간 암담하고 절망적인 분위기에서 헤매었던 나에게는 춘이가 'Super Woman'으로 느껴졌다고 내 후배 한 사람에게 이야기했더니, 후배는 "언니, Super Woman을 순우리말로 번역하면 무엇이 되는지 아세요? 난년이래요"라고 해서 또 한 번 박장대소를 했다. 이렇게 재담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행복감이 쏟아지는 시간에는 감미로운 몽상 같은 것은 불가능하지만 삶의 즐거운 음률이 있어서 좋았다.
며칠 후 다행히 퇴원 허가가 나왔다. 그 훈훈한 주변들을 뒤로하고 나의 작은 처소로 다시 돌아왔다. 일상이 시작된다. 시계처럼 일정 시간표에 따라 나는 움직여야 한다. 이제 시간을 놓고 어리광을 부릴 수 없는 형편이다. 정상적인 리듬을 찾기에는 아직 피로가 가시지 않았다. 쉬고 싶어서 주말을 기다리기도 하지만 반가운 친구가 오겠다고 해서 토요일을 기다린다.
삶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이 밀려오는 시간이다. 나는 이젤 앞에서 붓을 들고 봄꽃을 가득 그려 보았다. 불그스레한 꽃망울들은 모두 살아 숨 쉬며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이렇게 우리가 3월에 다시 찾아왔잖아요. 창을 활짝 열어 보세요. 산너머 아지랑이 속에 그리운 얼굴들이 보일 거예요.” 그렇다. 삶이란 만남의 연속이다. 생명의 3월도 죽음 같은 차가운 동짓달도 만나야 하는 것처럼 3월 친구를 만나야지... 기다리는 시간을 마주하고 있으면 소생하는 힘을 실어올 믿음 있는 얼굴들이 떠오른다. 진정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3월을 외면하고 소생하는 꽃망울을 질투하며 눈앞에 와 있는 따스한 햇살을 부인하는 몸짓일 것이다.
친구여, 우리는 살면서 고달픈 이야기들의 노예가 되지 말며, 날이 저물어 와도 하늘을 가로질러 내리는 빛 한 줄기, 끝까지 남아 주는 것에 몸을 맡기고 너절한 도시 표정에는 모르는 체 유유히 그래도 우리는 3월을 소망하자. 몸을 풀고 나온 젊은 엄마를 닮은 3월 품속에 한 번쯤 스스로를 다 맡긴 후 무중력 상태에서처럼 가볍게 걸어 보자. 그러면 일종의 비상 같은 것을 만나게 될 것 같고, 일상의 끈에 동여매였던 나는 또 다른 나를 창조해 낼 것 같다.
친구여, 기다림은 지루하지만 기다림도 없는 시간은 죽음이다. 그래서 우리 꽃을 그리며 시를 쓰자. 기다리는 시간을 장식하여 영혼을 불어넣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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