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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사랑의 섬 마요르카, 스페인

by 이다인 2023.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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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섬 마요르카, 스페인

 
망망대해 위에 떠 있는 외로운 섬이 애처로워 창조주는 흔히 크고 작은 섬들을 옹기종기 모아 놓았던 것 같다. 그것을 사람들은 군도, 제도 혹은 열도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섬은 늘 양면성의 극치다. 사방으로 물로 둘러싸여 있으면서 흔히 식수난을 겪어야 하고, 끝없는 수평선으로 무한의 공간으로 펼쳐지는가 하면 동시에 제한의 공간이란 것이 섬이다.

바르셀로나에서 약 200km쯤 떨어진 마요르카섬은 미노르카, 이비자, 포르망뜨라라는 작은 형제섬들과 발레아르(Baléares)라는 군도의 이름으로 지도책에 나와있다. 바르셀로나에서 20명쯤 타는 경비행기로 30분쯤 타고나니 벌써 마요르카의 수도 팔마에 도착했다.
 
이미 봄의 문턱을 성큼 넘어버린 4월 이른 아침, 비행기 창으로 안개 자욱하게 내다보이는 동녘에서 수줍은 듯 불그스레 내밀던 젊은 처녀 같은 모습을 보고 태양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 아침이었다. 오래전부터 살바도르 달리"카다케스의 풍경" 이란 그림과 함께 상상해 본 예쁜 마을들이 발아래 보이기 시작했다.
 
달리가 포트리카트의 어부존에 아틀리에를 꾸미고 작품활동을 했다는 것과 미로가 빠리와 바르셀로나의 것을 두고도 아틀리에를 카나마요르만의 높은 지대에 짓고 노후의 작품활동을 했다는 그런 집들이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을 섬에 나는 어린애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당도했다.
 
한국인들에게는 안 익태씨의 삶이 있는 곳으로 더욱 알려져 있지만 대학과 음악에 관심 있는 세계인들에게는 쇼팽쌍드의 사랑의 섬으로 더욱 많이 알려져 있는 곳이다. 한 도시나 어떤 공간이 인간에게 미적 감동으로 다가서게 되는 것은 대개 아름다운 자연과 건축물이 정답게 조화를 이루어줄 때다.

팔마항에 다가서면 꽃으로 덮힌 초호화판 호텔들의 깨끗한 현대 분위기와 22개의 고딕 첨탑이 솟아있는 대성당(1230~1601년 완성)을 비롯해서 중세 아랍왕국이었던 알무다이나궁, 그리고 론하(증권거래소)와 해양영사관인 고딕양식의 고풍분위기가 백중지세로 서로 당당하다.
 

알무다이나 왕궁의 라 세우 대성당

야자수의 가로, 협죽도와 금작화로 무성한 녹색거리, 짙푸른 하늘과 쪽빛 물결은 갈대무성한 강기슭에서 장천을 가로지르는 기러기떼가 보이는 어느 시골풍경을 만났을 때의 정서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참으로 신과 인간의 성공적인 합작품이다.

발레아르는 고대 때부터 그리스 로마를 비롯해서 카르타고, 비잔틴, 사라센에 점령당했으며, 완전 스페인이 되고 자치령(1983년)이 되기까지 영국과 프랑스도 군침을 흘리며 점령했던 지중해의 보석이다.

바로 이곳이 쇼팽쌍드"마요르카의 한겨울"과 "빗방울(전주곡 중)"의 산실이다. 폴란드 바르샤바 근교에서 불란서인 아버지, 폴란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7세 때부터 음악의 천재성을 드러내기 시작한 쇼팽은 20세 때 벌써 명성을 얻어 크게 활약했고 바르샤바를 떠나 비엔나를 거쳐 빠리에서 39세 동안 살았다.
 

쇼팽

지금은 빠리의 페르라세즈 공동묘지에서 영면하고 있지만, 쇼팽이 26세 때 6년이나 연상의 여인(남매가 있는 이혼녀)인 당대 빠리의 여류문인으로 사교계를 주름잡았고, 시인 뮤쎄와 베니스 여행, 빠젤로와의 관계, 연분이 많은 대담했던 쌍드와 사랑에 깊이 빠지게 된다.
 
두 사람의 만남에 대해 빠리 사교계의 잡다한 비난의 소리와 질서를 피해 사랑의 도피를 했다는 (1838년 11월 중순~39년 2월 12일까지) 이 섬의 풍경을 쌍드는 스위스의 도처에 흘러내리는 급류와 수시로 색이 변하는 구름색 때문에 고통을 겪는 화가의 입장과는 반대로 마요르카의 풍경은 화가를 기다리며 초대하는 것 같다고 쓰며 풍경의 동적, 정적 비교를 해주고 있다.

그때에 비해서 우선 인구도 많이 불어 현재는 90여만명의 인구에 연간 2,800만명이나 되는 관광객이 드나든다고 하니 과히 짐작이 갈 것이다. 한마디로 풍경이 다양하고 사람이 즐겁고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많은 요소들이 있다. 내가 묵는 호텔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오페라 극장까지 있었으니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곳이다.

극장에 가서 겨우 대여섯자리 남았다는 다음날 표 한 장을 구입해 놓고 신나는 발걸음으로 시내에서 북쪽으로 7km쯤 된다는 에스타블리멘츠(Establiments)라는 조그만 마을의 '손벤트(So'n Vent / 바람의 집)'라는 곳을 교외 버스를 타고 찾아갔다. 버스에 내려서 5분쯤 서성거리니까 겨우 자전거에 채소 몇 단을 실은 할아버지가 지나가기에 '손 벤트'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길거리에서 외딴집이며, 드높은 위치에 자리 잡혀 주변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오던 바람이 이 집에 맞닿게 되어 "바람의 집" 이란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그녀는 음을 다루는 천재의 여인답게 마요르카 밤의 두꺼운 정적을 뚫고 오는 암노새와 당나귀의 음악 같은 방울소리, 스페인 무곡인 볼레로의 음률, 아이들을 잠재우던 엄마들의 자장가 바람과 빗물소리, 돼지들의 꿀꿀거리는 소리를 쓰고 있어 역시 청각적인 요소에 특별한 예민성을 시사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들이 그곳에 온 것을 사랑의 도피라고 말하지만 사실 쌍드는 허약한 아들 모리스를 위해 휴양차  딸 쏠랑즈와 쇼팽이 함께 오게 되었던 것이라고 말한다. 사전 정보가 약했기 때문에 연간 66일만 비가 온다는 겨울 우기에 떨어졌고 "바람의 집"에 한 달쯤 머무는 동안 쇼팽이 기침을 심하게 하고 당시 페스트만큼 무서웠던 폐병이라는 의사 진단 소문 때문에 결국 마을 사람들과 집주인의 독촉으로 다시 이사를 해야만 되었다.

현재 이 집은 평범한 스페인 한 여염집에 지나지 않는다.주인의 친절한 안내로 내부를 볼 수 있었지만 19C의 대표 가는 낭만파 예술가들의 흔적이라고는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었음이 몹시 서운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나는 그들의 두번째 처소였던 발데모사(Valldemosa /시내에서 북으로 18km 지점에 옛 수도원이었으나 지금은 일반인이 살고 있음)에 가는 버스를 탔다. 쭉쭉 뻗은 길이 아니고 꼬불꼬불 계곡과 산등성이를 한참 오르내렸다. 마치 옛날 길 닦기 전 해인사나 동아사로 가던 심심산골절을 찾아가는 것 같았다. 내 옆좌석에 앉은 독일 아줌마는 적어도 80킬로는 나갈 것 같은 몸집을 하고도 맑은 공기와 기분이 좋아서인지 여간 가벼운 몸놀림이 아니며 가지고 온 독일어 안내문을 열심히 읽고 있다.
 
드디어 거의 정오에 그곳에 도착했다. 이미 와있는 대여섯 대의 버스와 주변 기념품 가게와 식당에 몰려있는 사람들은 모두 쇼팽과 쌍드 얘기로 꽃을 피우거나 쇼팽을 기념하는 2개의 방이 서로 주인이 다른 이유와 어린 아들 모리스가 그린 그림에 따라서 꾸며졌다는 정원애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다. 확실한 고증이 없이 두 주인은 서로 자기 방이 그들이 진짜 살았다고 우기는 가운데 여전히 운영되고 있다.
 
표를 사서 방에 들어가 보면 예상대로 그들이 사용했다는 소박한 의자 몇 개, 벽면의 사진들, 편지, 육필악보, 원고, 피아노 등이 있다. 나는 자주색 천을 입힌 단상 위에 놓인 마치 개선장군처럼 당당하게 보이는 피아노에 특별한 관심이 갔다. 그 당시 한 개인이 빠리로부터 그 무겁고 큰 악기를 국경과 바다를 건너 멀고 먼 그 골짜기까지 실어오라고 했다는 발상 그 자체가 잘 믿어지지가 않는다.

쇼팽의 피아노

 
단 3개월을 위해서 그때 교통수단을 감안할 때 그 꾸불꾸불한 산길을 넘어왔을 그 피아노가 신기하게만 보인다. 지금도 피아노를 옮긴다는 것은 그렇게 쉽게 생각할 수 없을 텐데, 가냘프고 여성 같은 체구의 쇼핑에게는 쌍드같은 어머니요, 누나요, 애인인 보호자가 없었더라면 마요르카의 아름다운 24곡의 전주곡과 노앙(Nohant / 쌍드의 시골집) 성에서 작곡한 야상곡, 발라드와 같은 여러 걸작들이 과연 탄생할 수 있었을까...

이 남녀는 9년간 세기적인 사랑을 했다고 하지만 동시에 24시간 2교대로 열심히 일을 한 사람들이다. 해가 뜨면 쇼팽이 피아노를 두들기고 작곡을 했고 몸이 약한 쇼팽이 피로에 지쳐서 초저녁에 잠이 들면 쌍드는 그때부터 별무리들이 사라질
때까지 소설을 썼다고 한다
.

쌍드

쌍드의 생애에 가장 중요한 두 남자는 역시 불란서의 4대 낭만시인 중의 한 사람인 뮤쎄(Musset) 쇼팽인데, 그녀는 이미 뮤쎄와도 이태리 여행을 한 적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마요르카의 한겨울" 속에서 베니스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뮤쎄 역시 귀공자처럼 잔잔한 외형에 여성적인 분위기를 가진 시인으로 유명하다. 몸집 좋고 씩씩하고 호탕한 남성을 쌍드는 싫어했을까.

그들이 살았던 주소는 빠리에서도 여러 곳에 있지만, 로맨틱 한 여정의 공간으로 마요르카섬은 이 남녀의 삶과 썩 잘 어울린다. 기후와 자연은 더할 나위 없었으나 계절을 잘못 택해 추위와 비 때문에 고통스러웠고 병에 시달리는 연인과 아들이 구성원이었던 마요르카 체류는 결코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한 훌륭한 여성작가에 대한 관심과 존경보다 누구누구의 부인에 선망과 가치를 더 두었던 당시 마요르카 사람들은 한 이혼녀 가 기침하는 한 피아니스트라는 젊은 남자와 두 아이를 데리고 온 쌍드에게 냉대했으므로 마요르카 사람들에게 야만인들이라고 극도로 증오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요르카행은 완전히 실패였다고 하는 걸 보니 꽤 고생을 한 모양이다.

그들이 산책했을 주변들을 돌아보고 마요르카 특유의 문양을 그려 넣은 예쁜 디저트 접시와 엽서 몇 장을 사서 돌아왔다. 몇 년 전에 쌍드의 노앙(Nohant) 성을 방문했을 때 리모즈(불란서에서 제일의 요업제작 산지)에 들러 8각 예쁜 접시 몇 개를 샀던 생각이 났다. 노앙성 부엌을 둘러보면 쌍드가 얼마나 철저히 가정 살림살이를 잘했던 여성인가를 알게 된다. 예쁜 가재도구, 식기들은 그녀의 취향이 어떤 수준이었는지 알만하게 했던 기억이 있다.
 
병풍처럼 둘러 싸여있는 발데모사의 푸른 산들을 보면 이곳이 섬이란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돌아오면서도 그 연약한 쇼팽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대동했어야 했던  크고 무거운 피아노의 운명과 가벼운 연필과 종이만 있으면 얼마든지 예술이 가능한 쌍드의 경우를 대비해서 생각하니 묘한 조화라고 느껴진다.

해마다 연중행사로 열리는 음악 페스티벌에 때를 맞추지 못한 것이 유감이었다.
 


 

팔마 데 마요르카
팔마 데 마요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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