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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푸치니의 호수, 이태리

by 이다인 2023.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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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치니의 호수, 이태리

 

 

피사에서 피렌체로 가는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사람이 푸치니(1858~1924)의 마을이 어디 있는지 모르고 놓쳐 버렸다면 대단히 억울한 일이다. 내가 Torredel Lago Puccini (토레델 라고 푸치니)를 찾아간 것은 밤이 몹시 짧은 한여름 초저녁이었다.

후덥지근한 공기에 길을 묻는다든지 목이 말라 카페에서 물을 잠시 마시는 동안에도 윙윙거리는 왕모기들이 얼굴과 드러내 놓은 팔, 다리를 계속 물어뜯었다. 왜 이렇게 큰 모기들이 동네 초입부터 대거 공격하고 있었는지 처음에는 알 길이 없었다.

금방 부풀어 오르는 다리와 팔을 짜증스럽게 긁으면서 Torredel Lago Puccini라고 써진 넓지 않은 길을 한참 따라 올라가니 길 끝 오른편에 푸치니 집이 있고 그 앞에 그리 크지 않은 광장 하나와 끝이 보이지 않는 호수가 나타났다.

비록 나는 생태학자가 아니었지만 모기들이 왜 그렇게 유난을 떨고 우글거렸는지 Massaciuccoli (마사시우콜리)호수 앞에서 비로소 알았다. 습지대와 왕모기의 삶은 서로 동반자적 조건의 관계였다.

 

야외 지아코모 푸치니 그랜드 시어터와 마사시우콜리 호수의 풍경
야외 지아코모 푸치니 그랜드 시어터와 마사시우콜리 호수의 풍경

 


멀리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 있는 이 넓은 호수가 바로 푸치니의 3부 오페라 <라 보엠>, <토스카>, <나비부인>의 산실(産室)이었다니 모기에 밤새도록 뜯기더라도 대예술가가 작곡에 몰두했던 장소를 와서 본다는 것은 내게 큰 의미였다.

푸치니의 유물이 전시된 별장은 전형적인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건축이며 꽤 넓어 보였다. 불과 집에서 30여 미터 거리에 그렇게 아름다운 호수가 펼쳐져 있으니 그의 시정()과 상상력은 오페라를 작곡하기에 신의 특별한 은총을 받은 셈이다.

 

논밭에 메뚜기, 을숙도의 철새, 우물가의 개구리, 비 오는 날에 달팽이… 가 기어 다니는 것은 만물이 자연의 순리에 따르고 있다는 것임을 Massaciuccoli 호수의 모기를 보고 또 한 번 깨달았다.

여기 토스카나의 푸른 하늘과 물은 가장 이탈리아적인 노래의 요람이 되기에 더 이상 적당할 수가 없다. 특히 푸치니의 <나비 부인>에서 <어떤 개인 날>과 <토스카>의 <별은 빛나건만> 같은 우리 귀에 익숙한 음률은 잔잔한 비단 같은 호수의 산책로를 걸으면서 만일 대예술가가 어떤 영감도 받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할 뻔했다.

푸치니를 그려 놓은 어느 구절에는, “평소에 자동차를 몰고 모터보트를 조종하고 지금이라면 멋쟁이 미녀에 둘러싸여 새로운 소설이나 연극에 여념이 없고…”라고 씌어 있었다.

이런 호수 앞에 살았다면 푸치니 아닌 그 어떤 이도 모터보트를 이호수에 띄우고 즐겨야 한다. 그리고 시 한 수도, 그림 한 폭쯤도 그려내야 제격이다. 음악가였던 아버지는 그가 5세 때 세상을 떠났지만 어머니의 강한 음악 교육열로 16세 때 오르간 콩쿠르에 입상한 이래로 밀라노 음악원을 거쳐 27세에 스칼라 오페라에서 데뷔작 〈빌리〉를 상영하며 절찬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이미 후일의 많은 성공의 약속과 같은 것이었다.

특히 푸치니는 무대 위에 여러 나라의 풍속물과 인종을 올려놓고 성공한 작곡가다. <서부의 아가씨들〉에서 미국을, 〈투란도트〉에서 중국을, <마농 레스꼬>와 <라 보엠>에서 프랑스를, <나비부인>에서 일본을 내놓았다. 특히 일본에 한 번도 가 보지도 않고 쓴 동경과 공상으로 만들어진 이 오페라가 이국 정서로 유럽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어 지금도 세계 오페라좌 어디에서나 공연되고 있는 것을 보면 예술가의 상상력은 과연 신을 닮은 데가 있는 것 같다.

 

나비부인사진

이상의 3부작은 한국 무대에서도 여러 번 보았고, 또 유럽에서도 보았다. 특히 파리에서 본  <나비부인>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서양에서 본 동양 여성의 비극적인 사랑을 그려서 그랬는지 참

애절한 느낌이었다. 이중 결혼을 한 뻔뻔스러운 미국 대위 핀거튼 에게 배신당한 일본 여자 쪼쪼상의 운명이 예사롭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그 구경을 같이 갔던 나의 일본 친구는 극장을 나오면서 시무룩하고 기분 나쁜 표정이 되어서 “전후 우리 같은 젊은 세대의 일본 여자들은 저렇게 나약하고 순진하며, 피동적이고 운명에 순종만 하는 여성을 싫어해요. 쪼쪼상이 전형적인 일본 여인상으로 세계 무대에 부각되는 것이 유감이에요" 하던 말이 지금도 기억난다.

광장 앞 동상을 지나 아이스크림을 보란 듯이 빨고 있는 어린애에게 이탈리아어로

무엇을 다정하게 설명하고 있는 젊은 한 엄마를 보는 순간, 괴로움에 찬 쪼쪼상이 그의 아들을 끌어안고 폐부를 찌르는 이별을 노래하며 자결을 결심한 뒤 아들을 의자에 앉히고 그의 손에 미국 국기와 인형을 쥐여 주며 눈을 가리던 장면이 떠올라 내가 이상한 환각의 순간을 갖기도 했던 푸치니의 호수였다.

별장 왼쪽 주변에는 나무들이 꽤 빽빽하게 서 있고 늪 주변에는 갈대 같은 키 큰 풀들이 수북이 솟아 엉켜 있었다. 60년대 이탈리아 영화 〈하녀(河女)〉의 늪 장면 같았다.

 

라보엠사진

일반인들이 지방에서 오페라를 구경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물론 오페라는 종합 예술인만큼 재정이나 인적 자원의 어려움도 많으리라 감안되는 일이다. 그런데 어느 날 지방에 체류할 당시 그곳 지역 성악인들로만 구성된 <라 보엠> 공연이 있다고 해서 필히 나는 한 좌석을 채웠다.

 

프로그램을 사서 읽어 내려가다가 오케스트라 지휘자 소개에 나와 같이 갔던 친구는 함께 깜짝 놀라면서 그 이름과 사진을 몇 번이고 꼼꼼히 보았다. 틀림없이 국민학교 때 한 반에서 공부하던 친구였음을 확인했다. 우리는 오페라가 끝나고 만났다. 40년 만에 만난 얼굴들이었다.

그날 저녁 우연히 어릴 때 친구 4명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우리는 감격했다. 한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 Y대학 음악과 S 교수)로 성장했고 벌써 대머리기가 있는 그 음악인의 훌륭한 외길에 마음속으로 박수를 보냈다. 그런 일이 있은 한 달 후에 내가 푸치니의 호수를 찾아왔기 때문에 나 개인적인 <라 보엠>은 더 우정적으로 느껴지는 오페라가 된 셈이다.


푸치니의 음악적인 평가는 바그너베르디와 동등하게 놓기에는 어림없는 일이나, 소시민적인 음악으로 시민적 청중과 시민적 취향의 사랑을 듬뿍 받기에는 대성공적인 작곡가라는 것이다.

나의 이 감미로운 방문을 기념하고자 카페에 들러 몇 장의 포스트카드를 샀다. 이가 빠져 발음이 똑똑하지 않은 카페 주인 영감은 짧은 불어로 푸치니를 자랑하느라고 온몸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어 카페를 경영하는 것이 생업이 아니라 푸치니의 긍지로 삶의 의미를 두는 것 같았다.

푸치니는 확실히 광영( )을 안겨다 준 이 마을의 아들이다. 이제 이 마을에서 영원히 휴식하고 있다. 푸치니라는 이름으로 똘똘 뭉쳐진 동네는 마치 오페라 무대의 한 세트 같기도 했다.


 

푸치니(1858~1924)
푸치니(1858~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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