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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향수의 메카 그라스 (Grasse), 프랑스

by 이다인 2023.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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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의 메카 그라스 (Grasse) , 프랑스


그라스 (Grasse)는 프랑스 영화도시 깐느와 북쪽 방향으로 20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과거 한국인들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않아서 크게 관심이 없었던 도시였다. 근래에 들어와서 신세대들의 배낭여행과 많은 국민들의 해외 나들이 특히 장년층의 테마 여행열로 많은 사람들이 들린다.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여기를 여러 번 왔다. 몇 년 전에 대장내시경을 하러 병원에 갔다가 외과의사의 실수로 갑자기 천공이 생겨 큰 수술을 치른 적이 있다. 그때 수술 담당의사의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만일 당신이 1 시간만 병원에 늦게 도착했으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뻔했습니다 다. 운이 대단히 좋으신 분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후 회복기 한 달 동안을 그라스 요양병원으로 옮겨져 지낸 적이 있다. 그때 가족과 친구들이 멀리 있어 나에게는 외로웠고 너무 힘들었던 불행의 공간이 그라스였다.
 
하지만 그때 병실 룸메이트 쟈닌느가 그라스 토박이라 밤마다 그곳 이야기를  재미있게 많이 들려주었다.  오래전에 내가 처음 그곳을 갔을 때는 좀 실망했던 것은 도시 규모가 그 명성에 비해 너무 작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지형상 그럴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바다와 20여 분의 운전 거리지만 니스나 깐느처럼 도시 자체가 바다에 접해 있지 않아 우선 3차, 4차선 같은 평지차도가 없고 인구가 5만여 명이 된다 하나 시내를 제외하면 여기저기 언덕 혹은 산비탈에 주택들이 산재해 있어 그런 것 같았다.
 

그라스
그라스

 
멀리서 보면 한 폭의 그림이다. 자동차로 갔을 때는 적당히 차를 세워놓고 걸어 다녀야 한다. 시내라고 해봐야 전부 걸어 다니면 된다. 우선 오피스 드 뚜리즘 (관광 안내소)에 가서 상세한 지도와 향수 매입 시 할인 쿠폰 같은 카드들을 집어 들고 주변에 있는 테라스가 있는 식당 앞에서 메뉴를 들여다보고 앉을 곳을 정한다. 느긋하게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 행동거지나 모양새를 보면서 즐거운 동행자와의 추억을 만들어 가기에 아주 좋은 작은 도시다.

이미 식당주인이라는 현지인들과 말을 섞고 있으면 스스로 자신이 그 도시에 동화되어 감을 느끼게 되고 친밀해진다. 그제야 바쁠 것 없이 거리여기저기 발 닿는 대로 겉모습을 구경하고 다니다가 여성들이 좋아하는 '프라고나르', '갈리마르', '몰리나르' 같은 퍼퓨머리(Perfumery) 이름들이 쓰인 디자인된 플라스틱 백을 하나씩 손에 들고 사람들이 모여 있거나 들락거리는 고급스러운 멋진 건물들 앞에 이르면 거의가 향수와 관계있는 공간이다. 그 속에 들어가면서부터는 그라스의 내면과 그들이 수세기동안 쌓은 내공의 시간을 만나게 된다. 어떤 가게에서 향수 한 병 사는 단순한 매매행위가 아니라 즐겁고 무언가 유익한 시간이 있음을 느끼게 됨이 그라스의 매력이다.
 
향수의 역사는 기원전 2천 년 경 미라 매장에 향을 사용했다고 믿던 이집트의 기록물에 쓰였다고 한다. 세월 따라 이슬람교, 불교, 기독교 같은 종교의식과 환자치료에 사용했고 점차 종교와 관계없던 절대 권력 왕조시대를 거쳐 이제 어디서나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향수의 4천 년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국제 향수박물관을 제일 먼저 가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다양한 소장품과 향의 다양한 재료, 방향 식물들을 다루던 도구, 흙 혹은 투명유리로 만들어졌다는 용기, 사진 등을 관람한 뒤 나는 향수와 인간의 삶이 얼마나 밀접해 있었는지를 솔직히 처음 제대로 느껴보았다.
 

향수 제조 연구실

프랑스 향수의 변천을 단시간에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는 가장 오래된 상표이며 궁중 향수 공급자였다는 갈리마르 1747 시내점포에 들러 보고 거리가 좀 떨어져 있는 역사관과 공장을 돌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갈리마르 보다 1세기 후에 생겨 당대 많은 프랑스 귀족들이 고객이었다는 몰리나르 1849 건물에 들러 향수공부와 눈요기를 충분히 하고 원하면 각자가 직접 향수를 전문 조향사의 도움으로 만들어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을 선택하면 좋다.
 
체험의 묘미를 느껴보는 것도 반복하던 일상에서 벗어난 행복한 시간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떠나기 전 에는 많은 여행객들은 가지각색 예쁜 향수병들, 비누, 오 드 뚜아레뜨 옷장향 같은 상품 몇 개를 사게 되면 마치 보석을 산 것 같은 설렘이 생길 것이다. 그 고급스럽고 묘한 프랑스인들의 독특한 진열분위기 기술 때문일까?

프라고나르 1926이라는 브랜드는 세계적으로 많이 알려졌고 한국에도 입점했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이 브랜드가 향수와 아주 잘 어울리는 작명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왜냐하면 프라고나르 (1732-1806)라는 로코코 미술의 대가가 태어났던 곳이라는 하나의 이유만으로도 충분하다. 특히 "<그네>   <연애편지 >  <독서하는 소녀>" 등의 그림들은 우리 눈에 아주 익숙한 것들이다.
 
그의 작품에서 종교, 저항, 영웅, 도덕, 책무, 고귀 그런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솟구치는 욕망의 힘과 사랑놀이들이 당시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의 극치였던 삶의 순간들이 빛과 어둠의 극적인 처리와 곡선의 율동감으로 장식적이고 우아함을 드러냈기 때문일 것이다.
 
로코코라는 화풍의 이름을 달고 육체적인 신비스러움, 연기처럼 상승하는 쾌락감, 성적 에너지, 이성의 부재 같은 이미지를 불어넣기에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후각이란 것의 구체적인 실체로는 향수가 딱 맞아떨어진다. 그라스는 즉 인간들의 '후각'을 관찰 연구하고 수백 년 실험하여 쌓아 오늘날의 명성을 얻은 도시고 '향기' 마케팅에 대박을 친 성공의 도시다. 아무리 여행에 지친 사람이라도 여기 와서는 프라고나르의 황금빛 나는 집 방문을 다음 기회로 미루지 말 것을 당부하고 싶다. 그리고 파리에 들리게 되면 오페라 가까이 2015년에 개관된 향수 제조를 위한 모든 비법까지 공개하는 이 브랜드의 박물관을 방문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위의 세 브랜드 이외도 그 유명한 코코샤넬 NO. 5는 이곳에서 조향 하여 가까운 국제 영화도시 깐느에 부티크를 처음 열고 판매했다고 한다. 겔랭, 랑콤, 디오르, 로샤스 등 수도 없는 회사들이 그들만의 향수를 여기서 제조하거나 장미, 재스민, 투베로즈 등을 경작하기도 하여 원료회사들까지 밀집해 있는 도시다. 패션의 완성은 향수에 달렸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니 세계 모든 패션 회사들이 그라스에 눈을 돌리는 것은 당연하다.

 

유명 향수사진
유명 향수

 


나는 이 글을 쓰면서 그곳 조향사 쟝 샤를르가 향수 교육기관을 세계 최초로 만들었다는 것과 중세 때부터 우수한 피혁 제조인이 그라스의 대표적인 장인들이었다는 얘기를 하던 쟈닌느 생각이 났다. 그리고 자기 집안이 당시 이태리와 교역이 잦았던 제노바에서 이민 온 장인 혈통이라고 들었던 기억이 새롭다. 가죽장인으로 유명했던 갈리마르 집안의 조상들은 향을 내는 수많은 식물들을 물에 담가 놓았다가 향료를 만들어 가죽장갑에 입히는 기발한 착안을 했고 16세기 때부터 왕가의 대환영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그라스는 17세기 때 이미 '장갑 조향사'들의 전성기를 이루었다는 기록이 있다.
 
세계적인 조향사들은 거의 그라스에서 태어났거나 거기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 Jean Carles (세계 최초로 그라스에 조향사 학교를 세움), Pierre Guerlain (5대째 향수가문), Ernest Beaux (샤넬 NO.5 조향 한 모스크바출신), jean Claude Ellena (그라스 출생-에르메스의 조향사), Jacques Cavallier (그라스 출생- 루이 뷔똥의 조향사), 이들은 모두 후각 천재들이다. 현대에 와서는 조향사들을 음악가나 화가처럼 예술가로 인정하는 경향도 있다.
 
악취의 마을을 향기의 도시로 승화시킨 갈리마르댁 조상님들께 세계인들이 모두 감사해야 될 것 같다. 부강한 국가일수록 향료 산업이 활발하다고 하는데 한국에서도 향료산업에 관심 있는 기업이 늘어난다고 들었다. 특히 한국 화장품의 질이 날로 향상하여 외국 여심까지도 사로잡고 있으니 어느 날 후각 천재들이 우리 앞에 나타날 것만 같은 예감이 나 만의 것일까.

그라스 향수 제조법은 이미 유네스코에 등재되어 있고 향수 한 종목만으로 얻어지는 그라스의 연간 수입이 상상을 초월한다고 하니 부럽기만 하다고 생각하면서 걸어가던 중에 문득 발걸음을 멈추면서  '아! 우리에게는 개성, 풍기, 금산에 인삼이 있지 않나' 하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렇다. 적어도 내가 만난 대부분의 세계인들은 고려 인삼의 가치를 알고 있었고 관심도 많았다.

독일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유명한 소설  "향수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1985)와 영화를 읽었거나 본 사람은 그 작품의 배경이 그라스라는 사실을 안다. 이 소설가는 독일 사람이지만 남불 엑상 프로방스 대학에서 역사 공부를 한 사람이기에 지중해 인들의 문화배경, 의식 모든 것을 잘 아는 사람이고 이 작품을 쓸 때 그곳을 직접 여러 번 답사했다는 것을 언젠가 읽은 것 같다. 그리고 톰 티크베어 감독이 영화화를 위한 허가를 받을 때까지 20여 년이 걸렸다고 하니 꽤 강한 개성, 고집, 비상업적, 확고한 내면 주체자임을 알게 된다. 소설 (48 개국어로 번역)과 영화로 모두 대 성공한 케이스다.

후각 천재인 작품 주인공 그르누이가 최고의 향수를 만들고자 하는 집념 하나로 죄 없는 25명의 여성을 살인한 기상천외한 범죄 이야기다. 막상 주인공은 어느 날 자신에게서는 냄새가 없음을 깨닫게 된다. 무취 남자의 향수 집착, 이 얼마나 야릇한 운명인가. 이런 작중 인물, 소재, 구성들이 우리에게 암시하는 것은 '사랑'이란 주제를 동시에 던지기도 한다. 사랑이란 걸 단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고아출신의 그르누이의 향수 에 대한 집념을 말해 주고 있다.

그라스는 엑상 프로방스 처럼 자동차를 타고 도시를 조금만 빠져나가면 만나게 되는 보랏빛 라벤더 넓은 들판이 펼쳐있다. 온화한 기후, 늘 파란 하늘, 오렌지 꽃 장미 미모사, 오뉴월 재스민, 수도 없는 꽃 들이 만발하는 봄과 여름은 나날이 향의 잔치다. 움직이는 그림이다. 돌아가는 차속에서 나는 가끔 에디프 삐아프'장밋빛 인생'과 한때 연인이었던 이브 몽땅 '고엽'을 틀어놓고 따라 흥얼거리기도 한다.
 

라밴더
라밴더 들판

 
특히 에디프 삐아프는 굉장히 사랑받는 최고의 샹송가수이나 그 삶 자체는 너무나 애처롭다. 수많은 연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외로움을 달래주던 알코올, 담배, 무질서한 사랑놀이가 마침내 폐암이란 선고를 보냈고 가수는 46살에 타계했다. 두 번째 남편 떼오 사라포 (26세 연하)와 함께 지내면서 요양했던 곳이 바로 그라스 별장이었다고 들은 적이 있다.
 
이곳 사람들은 5월 장미 축제8월 재스민 축제를 기다린다. 때로는 거리에도 향을 뿌린다고 한다.

모두 행복해라.   '불행 근접 불허'라는 싸인이라도 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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