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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오르세 미술관(Musée d'Orsay), 프랑스

by 이다인 2023.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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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세 미술관(Musée d'Orsay), 프랑스

 

빠리는 늦가을부터 비가 자주 내린다. 그러나 현악의 저음(低音)처럼 부드러운 빛은 엷은 파스텔색으로 칠해져 있는 듯하다. 오늘 아침은 유난히 안개가 짙다. 1미터 밖의 물체가 보이지 않을 정도다. 그 속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유령처럼 형태만 있을 뿐이다. 이런 날은 집에 있으면 불이익이라는 것을 오랜 외국생활에서 터득했다. 바바리를 걸치고 우산을 손에 들고 런던 브리지를 거닐던 어떤 영화의 스타처럼 나 자신도 본래의 나를 벗어나서 배우가 되어 보는 것도 전혀 나쁘지 않다.

오늘처럼  궂은비가 내리든가 안개가 짙게 끼이는 날에는 나는 종종 그곳을 찾아가곤 한다. 온 시가지가 박물관인 이곳에서는 목적지를 굳이 정할 필요도 없지만, 오르세 미술관을 막연히 머릿속에 넣고 로열교각을 건너 쎄느강변을 거닐다가 Solférino 지하철역 앞에 이르면 쇠스랑 위에 큰 말조각이 서있는 조그만 광장의 건물이 나타난다. 여기에는 여러 종족의 얼굴과 언어, 몸짓들이 모여, 웅성거리며 사진을 찍어댄다. 온몸의 기를 눈에 집중시키고 사방을 살피고 있는 방문객의 모습에서, 이곳이 빠리의 명소임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오르세 -미술관
오르세 미술관


1986년 12월 1일을 기해서 오르세 미술관에 대한 얘기는 유럽의 신문, 잡지 등 모든 언론매체가 기사거리를 쏟아 내었음은 물론이고, 그 당시 문화인들 간의 화두거리이었다. 모두가  프랑스인들의 고도의 심미안과 창의력 그리고 예술에 대한 관심에 대해서 경탄을 했다. 1871년에 오르세 건물은 대화재로 폐허가 되다시피 한 것을 19세기 말엽에 한 철도회사가 사들여서 기차역으로 만들었다. 그곳은 거의 40년간 불란서 서남행(西南行)의 가장 중요한 철도역사였으며 하루에 200여 개의 열차 출발지였다고 한다. 그 후 모든 노선이 전동화되면서 장거리를 달리는 여러 차칸이 붙은 열차를 수용할 수 없게 되어 결국 오르세역은 본기능을 상실하게 되었고 그 용도가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2차 대전이 끝났을 때는 포로들의 귀환역이 되었고 1962년에는 Orson Welles에 의해서 각색된 카프카(Franz Kafka,1883 -1924)의 ‘소송’ 이란 영화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또한 1973년에는 르노-바로 (Jean Louis Barrault,1910-1994) 극단이 이곳을 무대로 사용하기도 했다.

오늘의 이 전시관이 마련되기까지는 프랑스 최고 지도자들의 역할 또한 대단했다. 1973년에 드골장군은 거의 폐문상태에 놓인 오르세역을 19세기 작품을 소장할 미술관으로 개조할 것을 결정했고 4년 뒤인 1977년 10월 20일에는 드디어 드골의 계획을 이어받아 그 작업에 착수하게 됐다. 콩쿠르를 거친 일류 건축가 P.Colboc, R.Bardou J.P.Philippon, Gae Aulenti들이 공동 참여하여 실내장식을 한 결과 1986년 12월 1일에 미테랑 대통령에 의해서 개관식을 하게 되었다. 아무리 정치하는 사람이 바뀌어도 국가나 사회적 차원의 계획이나 일은 뒤틀리거나 또는 전혀 차질을 빚지 않고 말없이 깨끗한 결실을 거둘 수 있는 사회는 이미 격조가 높은 사회이며 정치풍토가 잘 다져진 국가라는 것을 인정해야 될 것 같다.

겉모습은 분명히 빠리의 다른 역처럼 기차가 즐비하게 있을 것 같은데 안에 들어서면 과거에 기차가 있었을 자리에는 깨끗한 베이지색 바닥에 멋있는 조상들이 드문드문 들어서 있다. 또한 동시에 관람자들이 지나다니는 큰 통로가 되어있어 확 트인 아름다운 공간을 만나게 된다. 돔을 느끼게 하는 곡선의 높은 천정은 작품들을 위한 빛처리에 최대한의 신경을 썼을 뿐만 아니라 정교한 음양각은 작가들의 정성스러운 손길 하나하나를 금방이라도 느낄 만큼 아름답게 만들었다. 3층으로 되어 있는 오르세 미술관의 작품 진열은 작가, 미술, 시대별로 되어 있고 통로를 중심으로 양쪽에 크고 작은 여러 전시장이 연속되어 있다.
 
 

빠리에는 소위 Musée라는 이름이 붙은 상설 전시장이 50여 개 이상이 있다. 개인 갤러리인 사설 전시장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예술작품은 통시적으로 한눈에 보려면 3개를 꼽을 수 있다. 첫째 루블 박물관(선사시대부터 18세기까지), 둘째 오르세 박물관(19세기 작품), 셋째 뽕삐두 센터(20세기 현대작품)를 들 수 있다. 이 전시장의 인상주의 중요작품들은 루블박물관에서 뛸러리공원의 쥬 드 뽐므(Jeu de Paume)를 거쳐 오르세가 개관되면서 이전해 온 것들이다. 세기마다 중요한 작가들이 많지만 특히 인상주의 작가들, 모네, 르느와르, 마네, 피싸로, 드가, 반 고흐, 세잔느... 등 이런 화가들의 작품은 누구의 눈에나 가장 많이 익숙해져 있다. 바로 오르세는 이런 대가들의 사후의 화려한 공간이다.
 
오르세 같은 공간은 마음이 우울하고 고독할 때도 좋고 마음이 가볍고 행복할 때 와도 좋다. 대예술가들은 언제나 수많은 다정한 얘기를 들려준다. 방문자들의 역량에 따라 배우고 익히고 느끼고 갈 수 있다. 그래서 예술가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하나보다. 나는 그 화려한 그림과 엄청난 그들의 삶 앞에 서면 내가 너무 초라한 것 같아서 때로는 기분이 위축될 때도 있다. 그러했던 어느 날, 나에게 구세주 같은 그림 한 점이 한쪽 구석에서 눈에 띄었다. 그때 내가 얼마나 반가웠고 구제된 기분이었는지 다른 사람들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크리스털 화병의 패랭이꽃과 끌레마띠뜨

그 그림은 56 ×35cm의 작은 유화인데 마네가 1882년에 그린 “크리스털 화병의 패랭이꽃과 끌레마띠뜨”라는 제목이 붙은 작품으로 보라색꽃 한 개와 작은 연분홍 꽃 몇 개가 흰 유리컵에 꽂힌 작품이다. 우선 작품의 크기가 작고, 배경이 전혀 없는 그 소박함이 나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그렇게 순수하고 깨끗할 수가 없었다. 마네가 그것을 그렸을 때는 틀림없이 사심 없는 어린아이 눈으로 임했을 것이며 영혼은 티 없는 천사의 것을 닮았으리라. 마네의 그림 중에 저런 것도 있었던가 하고 나는 좋아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작은 것에 눈썹 하나 돌리지 않았을는지도 모르지만 무슨 인연인지 나는 그 그림에 강한 애정을 느끼게 되었다.
 
 
꽤 오랜 시간을 그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출구옆에 있는 사본 매품점에서 엽서 2장을 사서 그날 내 기분을 충분히 이해할만한 서울 친구에게 한 장 붙이고, 한 장은 내 방에 꽂아 두고 가끔 보고 있다. 먼 후일 나는 우연히 그 그림을 좋아하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데 취향의 우연한 일치감 때문에 지금도 친하게 지내고 있다. 이렇게 우연이란 단어는 때로는 우리 인간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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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이 친숙한 19세기 인상주의 화가들의 걸작품 슬라이드 연속 사진      9매/ 오르세 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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