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그리스
그리스로 가는 비행기 속에 바이런의 《차일드 헤럴드의 순례》같은 시집 한 권쯤이 동반되면 아주 좋다. 〈아테네의 소녀에 대한 사랑〉 이나 〈그리스 섬들〉 같은 시는 시인과 분리되어서는 전혀 읽을 수 없을 만큼 솔직하고 정열적인 그의 그리스에 대한 숨소리를 듣게 된다. 비행기 속에서 나는 로마 ‘까삐똘’ 박물관에서 본 유난히 턱수염이 징그럽게 조각되었던 호머를 생각했고, 트로이 전쟁 때 율리시즈 왕이 10년 동안 겪은 영웅적 정신을 푸른 지중해를 내려다보면서 상상해 보았다.
이미 에게해의 꿈꾸는 듯한 물결은 라마르띤느, 샤또브리앙, 바이런 같은 19세기 낭만주의 시인들에 의해 찬양되었던 이래로 세계인들의 발길이 연간 수천만 명의 발길이 와닿는 곳이다. 서양의 많은 문물을 아테네를 빼놓고 이해한다는 것이 무리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 중요한 땅에 가 본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감격이고 흥분이다. 이미 발을 들여놓기 전에 그리스에 대한 지식을 읽어서 다시 정리해 오는 것이 바람직하다.
신들의 고향 아테네는 언제나 유럽인들에게 매력이며, 특히 여름이 러시다. 그리스는 소위 말하는 물, 불, 대지, 공기라는 우주의 4 원소가 각기 현상으로서 실현되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장소 같은 생각이 드는 곳이다. 이 4 원소가 없는 곳이 어디 있으랴만 그리스의 것은 특징적인 데 묘미가 있다. 하늘의 불볕, 졸고 있는 듯한 파아란 에게해의 물, 사원의 주랑(柱廊)을 넘나드는 바람, 붉고 희고 푸른 돌로 이루어진 대지, 이 모두가 강한 개성이다. 그리고 이 4 원소들은 각각 신을 가지고 있다.
프로메테우스라는 불의 신, 포세이돈이라는 물의 신, 돌을 나르는 시지프, 바람을 다스리는 에오스 같은 신들이 그리스 인의 신앙에 존재한다. 그들의 선조들은 일찍이 물을
지배하는 능력이 있어서 항해와 선박의 챔피언이 있는가 하면, 돌을 다루는 솜씨 또한 그 어느 누구도 따를 수가 없었다. 이미 서기 이전에 번창한 영화를 누렸던 아크로폴리스 성채(면적 4헥타르, 가로 156 미터, 세로 270 미터, 해발 156 미터)의 이곳저곳 폐허로 산재되어 있는 유적들을 보고 있으면 시간에 대한 개념에 혼란이 일어나면서 역사라는 것에 대해서 설명할 수 없는 잔잔한 회의에 빠지게 된다.
누구든지 여기에 오면 돌(石) 잔치의 초대 손님 같은 기분을 계속 느끼게 될 것이다. 조각가들이란 그들의 인생을 돌에 건 사람들임은 익히 알고 있지만, 이렇게 거대한 집단이 돌에 대한 정열을 퍼부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놀라운 일이다. 물론 모든 물질 가운데 돌이야말로 영구 불멸하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런 영원한 것을 통해서 그들의 영혼을 표현하고 신전을 짓고 그 안에 신을 모셨던 고대 그리스 인들의 종교와 더불어 그들의 예술, 학문의 선진성을 우리는 여기 돌을 통해서 다시 확인해 본다.
나는 아크로폴리스 폐허에 도착한 후 돌이 나이가 먹고 늙어지면 저렇게 아름다워질 수가 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자연 풍화에 시달리고 지치며, 사계절 겪을 것을 다 겪어 본 수천 년 된 돌들이 이런저런 표정으로 널려 있는 이곳은 한마디로 돌의 아름다움의 극치다.
비록 그리스가 지금은 미약한 힘의 나라이지만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돌 유산 하나만으로도 그리스는 세계인들의 선망국으로 영원히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불이 쏟아지는 아테네의 8월 하늘 아래서 나는 살이 익어가는 것 같은 뜨거움을 느끼면서도 이 보물의 성채를 여러 번 오르내리면서 열심히 공부에 몰두하는 학생처럼 관찰하며 머리에 집어넣느라고 애를 썼다.
이 언덕에 있는 중요한 기념물인 파르테논과 아테네 나이키(Templed'Athéna Niké) 사원은 모두 흰 대리석으로 되어 있는가 하면 쁘로뻘레(Propylées)는 푸른빛이 도는 대리석으로 되어 있어서 그 건축물들이 손상되지 않았을 때의 풍경을 상상하면 꿈에서나 보는 별천지 같은 곳이다. 이 광대하지 않은 공간 안에서 서양 미술사를 공부할 때 조그만 사진으로만 보았던 여러 시대에 걸친 작품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기쁨에 나는 탄성을 올려야 했다.
지붕들은 모두 세월에 날려 버렸지만 지내 발처럼 48개나 되는 기둥만남은 파르테논에 갔을 때는 여기저기 관광객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마치 나에게는 구석구석 사방에서 신들이 튀어나와, "그리스의 중요한 3대 건축 양식 중에 가장 옛날 것인 도리아 양식을 공부하러 여기 오셨겠지요? 주랑 하나하나의 단순미와 육중한 것을 꼼꼼히 음미하고 가시오" 하고 내 귀에 일러주는 것 같았다.
다음으로 소아시아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아테네 나이키 사원에서는 보다 날렵하고 소용돌이 기둥머리에 신경을 쓴 이오니아 양식의 시대적 감각을 비교해 볼 수 있어서 더없이 좋았다. 꽃잎 조각으로 주두(柱枓)를 우아하게 장식한 올림피언 주피터 사원은 마치 한껏 멋을 뿌리고 있는 천상 미녀들의 비상 직전의 모습처럼 경쾌하고 아름다웠다. 이 코린트 양식의 걸작 앞에서 "아, 돌!" 이런 단음절이 나도 모르게 신음처럼 내 입에서 가냘프게 흘러나왔다.
고대 때부터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의 신을 숭배하는 특징이 있었다면 그리스 인은 그 어느 민족들보다 여러 신을 섬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었음이 확실하다. 그리고 그리스 신화를 읽고 있으면 우리와 먼 엉뚱한 이야기 같으면서도 우리나 다름없는 보편적 인간 행적 같은 것을 느끼게 할 때가 많다.
그리스의 신들 중에 가장 미남이라는 아폴로 신의 조상(彫像)을 보면 오른손을 옆으로 쳐들고 싸움을 심판하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데, 그의 단정하게 손질된 곱슬머리와 발달된 근육은 우리에게 신의 존재라기보다 스파르타 국의 한 영웅을 상상하게 한다. 그들의 신에 대한 묘사와 예술 표현은 인간과 똑같은 육체와 삶으로 되어 있되, 단지 ‘능력과 불사(不死)' 면에서만 인간과 다르다는 것을 표시하기를 좋아했던 것 같다. 즉 그들의 신과 역사적인 영웅들의 이미지는 겉보기에 다를 것이 없다
또 하나 사람들의 눈길을 유난히 끌고 있는 것은 캐리아티드 (Caryatides)의 건축물 지붕을 이고 있는 6명의 처녀 조상이다. 그들의 조용한 얼굴에는 평화와 품위가 서려 있고 튜닉을 입고 있는 몸매의 유동성, 이 모두는 그 시대의 대접받았던 행복한 여인상으로 나타났다. 예술이 시대의 거울이라면 이 처녀 조상들은 확실히 그리스 여성의 만만치 않았던 사회적 지위도 함께 상징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문화가 꽃피고 문명이 발달된 시대에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도 언제나 높았기 때문이다.
그리스에서 오래 머물 시간이 없는 사람은 시내의 시시한 기념품 가게에서 날리는 시간을 아껴 에게 해변에서 행복한 몽상을 하든지 아크로폴리스 성채 하나라도 눈여겨보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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