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의 진주, 타이티 ( 3 )
- 지상의 특급낙원 보라보라 섬에서
지상의 특급낙원이라는 보라보라에 가려고 45분 동안 경비행기를 탔다. 비행기 예약에 며칠 전부터 신경 쓰지 않으면 언제나 만원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타이티섬에 비해 아주 작고(전체 둘레 32km), 인구도 4천 명 정도가 살고 있고, 현대식 빌딩 호텔이 아직은 하나도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아마 주민들도 반대하고 법으로도 규정되어 있다고 들은 것 같다. 여행사를 통해 호텔예약을 부탁했을 때 우선 방이 없었고 가격은 엄청났다. 좀 이해가 안 갔는데 막상 와보니 사실이었다.
우선 섬 전체에 호텔을 고층으로 짓지 않고 단층으로 된 방갈로식 방뿐이기 때문이다. 좁은 땅 때문에 방의 부족현상이 일어나는 것 같다. 흔히 호텔에는 두 종류의 방갈로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정원이 있는 것과 물 위에 떠있는 방갈로인데, 후자가 훨씬 비싸고 고급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모든 것이 비싸기 때문에 일본 단체 관광객들은 새벽에 와서 섬을 돌아보고 저녁에 파페에테로 돌아가는 프로그램을 만든다.
나는 운 좋게 보라보라의 첫밤을 바다에 떠있는 오막살이 방에서 잤다. 깨끗한 방 한 칸과 화장실이 붙은 마루 하나, 베란다이다. 여기 연평균 기온이 25도 4부라 항상 덥지만 바닷바람이 불어 상쾌하다. 초호 위에 떠있는 침실 속에 내가 누워있다고 생각하니 신기해서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자는 둥 마는 둥 하룻밤을 지내고 눈을 뜨니 바로 보이는 물 위에 일출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아직도 낡은 문명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 보이는 이 작은 섬 토인들의 집들이 초라하거나 야만으로 보이지 않고 평온한 가운데 신비롭게 보인다. 내 침실 아래서 파도는 마치 채찍을 든 혹독한 선주들을 섬기는 노예선에서처럼 한순간도 쉬지 않고 철썩인다. 베란다에 나와 수면을 보고 있으면 흰모래까지 다 보이는 밝은 물속에서 가지각색의 고기들이 떼를 지어 돌아다니는 것이 어항에서처럼 다 보인다. 낮에는 수종 산소마스크를 메고 두어 시간 정도 물속에서 지냈다. 영상화면에서 는 보았지만 내 눈으로 직접 이렇게 수중을 볼 수 있는 기회는 처음이었으므로 나는 스스로 내 용기에 감탄했다.
스노클링이 익숙해지자 다음날부터 계속 여기저기 작은 산호초들 사이를 오가며 미리 물속에 빵조각을 가지고 들어 가 고 기 모이를 던지기도 했다. 그러면 검정 노랑 수직줄무늬를 한 두둥갈이 돔, 노랑 청색 수평줄무늬를 두른 황새치, 그리고 이름 모를 수많은 투명한 작은 고기들이 벌떼처럼 모여든다. 나는 내가 수중에 있다는 사실도 순간적으로 잊어버리고 고기들과 행복하게 놀고 있었다. 일찍이 수중세계가 이렇게 생생하게 모든 것이 질서 있게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나는 한 번도 실감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산호들의 색깔도 분홍 이외 이렇게 다양한 줄도 몰랐다.
일단 물 깊이를 알고 있기 때문에 나 같은 초보자도 수영만 할 줄 알면 스노클링을 즐기기에는 더 이상 없는 좋은 조건의 바다임을 알았다. 단지 조심 해야 될 것은 여기저기 수없이 깔려있는 산호초에 발이나 몸을 찔리지 말아야 한다고 모두가 주의를 시켜주었다. 뭐니 뭐니 해도 호주 동해안의 5분의 3을 차지한다는 유명한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의 산호초들이 있다는 곳에 가보고 싶어 진다. 사진으로만 보아오던 헤론섬, 그린섬의 주변 물고기들과 산호초의 생태들에 관심이 생기면서 어느 날 꼭 가보아야겠다고 꿈꾸어 본다.
아무리 태평스러운 곳이라 해도 여기가 프랑스 행정구역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하는 것은 동네 입구에 있는 파리에서와 똑같은 전화통에서다. 프랑스에서 정반대 방향 그리고 그렇게 먼 거리에 있는 이 가냘프고 예쁜 시골처녀 같은, 아니 심장에서 너무나 먼 실핏줄 같은 이 섬에까지 그런 전화 통이 있고, 국내선 번호만으로 통화가 가능한 것이 놀랍다. 텔레비전 화면내용이 거의 불란서 국내 어느 가까운 섬으로 착각할 정도다.
보라보라의 자연은 “예술”그 자체다. 섬에 도착하자마자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오트마뉘산(해발 727m)은 이 섬 전체에서 유일한 남성적 모습이어서 돋보인다. 마치 쪽빛 치마 바다라는 여인들을 사방에 거느리고 능력을 과시하는 듯 신격화된 어느 왕의 분위기와도 닮았다. 밤이면 이 산과 바다 사이의 사랑의 통신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수중이나 해변 모래사장에 있는 은신처에서 그 잘난 걸음걸이로 육지에 올라와 뛰고(?) 있는 뛰빠라고 부르는 게를 길거리에서 보는 것이 재미있다. 큰 종류의 위험한 동물들은 전혀 없다고 하니 마음 놓고 산길을 걸어보았다. 보라보라의 원뜻은 "바다에서 최초로 떠오른 섬"이라는 전설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느긋하게 바캉스를 즐기는 동안 잊지 못할 것은 또 요리를 꼽을 수 있다. 여기 오는 외국인들은 약 10명쯤 어울려서 작은 배를 세내어 음식을 싣고 두어 시간 섬을 돌다가 어느 은빛 백사장에 키 큰 종려나무들이 손짓하는 듯한 너풀거리는 애기섬이 보이면, 거기에서 쉬어가는 멋을 부리는 것이 큰 재미 다. 한 배를 탔다는 이유 하나가 종족, 국가를 초월해서 빨리 친해져 버려 미국, 프랑스, 한국인 등의 개념이 희석된 채 우리는 열심히 노동을 한 다음에 휴가를 지내러 잠시 왔다는 공동체 의식을 묘하게 느끼게 된다.
선유(船遊)를 즐기는 동안 흰 물새들이 떼를 지어 우리 주변을 배회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고기를 싣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를 안내하는 뱃사공은 이미 새들을 위해서 생선을 잘게 썰어서 잔뜩 싣고 왔다고 한다. 하기야 저희들 공간을 인간이 사용하고 있는 셈이니 세금을 바쳐야지… 물새들이 일 미터 높이쯤으로 던져주는 고기를 한 마리씩 잽싸게 하강하여 부리로 찍어가는 광경은 정말 볼만하다. 특히 내려오면서 흰 두 날개가 갑자기 쪽빛 물빛에 반사되어 묘한 코팔트색 야광으로 변해버려 새가 아니라 요술새 같았다. 그렇게 아름다운 물새를 본 적이 없어 열심히 사진을 찍어 놓았는데 나중에 현상해 보니 그 장면만 흔들려서 실수를 해 버린 것이 분하다.
배를 타고 가는 동안에 창공의 새들만 먹이를 주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지점에 이르니 작은 상어들에게도 통행료를 바치고 가야 하는 곳이 있었다. 뱃사공은 우리들에게 빵을 건네주면서, 이 장소는 '상어 먹이 주는 곳'이라면서 잠시 내려 수영을 하면서 빵조각을 던져주라고 했다. 뱃전에 큰 막대기를 걸쳐 놓고 위험 경계선 앞을 나가지 못하게 했고 큰 상어가 올 때는 뱃사공이 직접 수중에서 전담해서 주었다. 사람 잡아먹는 고기로만 알고 말만 들어도 무서워했는데 이렇게 인간과 물고기가 주고받고 친하게 살고 있는 곳이 있는 줄은 몰랐다. 그곳은 바로 많은 배가 지나가는 뱃길이기 때문에 상어 떼들이 미리 알고 배가 지나가면 떼를 지어 빵을 얻어먹으러 온다고 한다.
이렇게 하늘의 새와 수중의 고기들에게 고사 아닌 고사를 지내고 순풍을 타고 이름도 없는 어느 애기섬에 도착했다. 아침 9시에 출발했는데 이미 정오가 되어 태양이 이글거리며 하늘 중앙에서 군림하고 있는 시간이다. 가벼운 아침을 먹어서인지 모두가 배가 고파온다고 한다. 우리는 해변 종려나무숲 속에서 토착민들의 요리를 준비했다. 이미 통나무 상과 의자들이 놓여있었고 그 옆에는 간단한 바베큐 시설까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점심요리를 즐기는구나 하는 것을 알았다. 우리의 뱃사공 파누라는 남자는 별로 말이 없으나 머리 회전도 행동거지도 재빠르다. 성큼성큼 몇 발자국 길어가더니 야자수 넓은 잎들을 몇 개 쳐서 바다에 씻어내어 식탁보 대용으로 깔았고, 나무그릇을 하나씩 돌려주었다. 상 위에는 큰 요리접시들과 꽃과 잎 그리고 향기로 호화로웠다.
생선냄새는 온 주변에 진동했으나 야외공간이라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다. 또 그들은 생선회를 먹는데 우리 식과는 다르다. 회를 쳐서 토마토, 피망, 코코넛 밀크와 레몬즙을 넣어 섞어 먹는 요리인데 모두들 별미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뜨거운 돌 위에 잎에 싼 요리를 쌓아 놓고 흙으로 덮었다가 끄집어내어 먹었는데 깨끗한 오븐요리보다 더 오리지널 한 맛이 있어 이국정취를 그득 느껴야 했다. 여성들이 요리에 신경을 많이 쓰는 것은 "사랑"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농담들을 하는 것을 들었다.
나는 여기 있으면서 몇몇 친구들에게 엽서를 띄우면서 "아마 아담과 이브가 여기에 살았을 거야"라고 쓴 적이 있다. 소박한 자연숭배, 원시인간과 같은 분위기에 벌거숭이 내게(内界) 에만 존재할 수 있는 순수하다 못해 차라리 특유한 세련미와의 융합 같은 세계의 경험을 한 나는 어떤 변화가 내 속에서 일고 있는 것 같았다. 이것을 빨리 물감으로 표현하고 싶다. 오랫동안 침체했던 시간이 되살아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아, 그 다양한 물색, 생동하는 산의 푸르름... 다시 가고 싶어라. 보고 싶어라. 어느 날 그 초호(礁湖)에 살고 싶어라.
이전 글 링크 / 2023.08.14 - [유럽 外] - 태평양의 진주, 타이티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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