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르그의 낙인제, 프랑스
프랑스의 노천문화를 이야기할 때 나는 남부 프로방스의 한 지명을 얘기하고 싶은 데가 있다. 바로 동식물 천연보호지역으로 널리 알려진 까마르그(Camargue)라는 대평원이다. 물론 인근 지역에는 론느 (Launes)와 엥뻬리알 (Imperial)이란 큰 늪도 있고, 쌩뜨 마리 드 라메르(Stes maries-de-la mer/ 이 지방의 성녀(聖女)에 대한 유명한 전설이 담긴 교회의 이름을 따서 부름)라는 동네 앞에는 다른 프랑스 어느 해변에 비해 잘 정돈된 인공의 손길이 뻗치지 않았던 해변의 원시적인 냄새가 있다. 이런 곳들은 바로 그런 점이 좋아서 사람들이 많이 몰려가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5월 24일과 25일 양일은 집시들의 순례와 축제로 유명하다. 거의 유럽의 집시들이 다 몰려오는 듯했다. 그중에는 그야말로 포장마차를 끌고 오는 사람들로부터 벤츠를 타고 오는 사람들까지 그야말로 형형색색이다. 마르세이유 주변에 살고 있는 한국 교포들과 모래사장에서 불고기 구워 먹는 재미로, 또 학교 친구들과는 여름이면 수영을 하러 몇 번 간 일은 있지만 “굿”을 보러 간 것은 어느 해 사월 비 오는 날 아침이었다.
우리 일행은 국도 570이란 팻말이 군데군데 붙은 도로를 따라 달렸다. 고원(高原)이 없는 이 지역의 초원을 들어서면 빨간 꼬꼬리꼬 꽃들이 사춘(思春)의 무리처럼 율동하고 있고 심심치 않게 보이는 농가들도 프로방스 특유의 붉은 지붕을 이고 쏟아지는 아침 햇살에 시린 듯 눈을 뜨고 있다. 우선 이런 농가에서는 가난에 찌드러 진 비극 냄새가 나지 않아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편하게 한다.
남불 엑스에서 한 시간 반쯤 달려왔다. 570 국도를 빠져나와서부터 꼬불꼬불한 작은 도로를 달리는 동안 포장되지 않은 길의 먼지로 모두 뿌연 사람이 되어 버렸다. 이미 우리는 문화권을 벗어난 곳에 와 있음을 실감했다. 우리 일행들의 목적지는 그 넓은 벌판에 자리 잡고 있는 한 목장이었고 바로 거기서 그날부터 야생 소가 되도록 “낙인제"(Ferrade)라는 것이 있는 날이었다. 옛날부터 까마르그 말과 소(투우용 소)는 프랑스에서 유명하다.
까마르그에는 여러 목장주가 있다. 우리가 갔던 목장주, 롯씨영감 집안은 형제가 셋인데 모두 선친의 땅을 물려받아 목장을 경영하고 있었고 그날 우리가 간 목장주는 롯씨영감의 형수(형은 작고)인 스페인계 미인이 주인이었는데 그날 낙인제 (烙印祭)를 위해서 시동생 둘과 아들, 조카 그리고 각 집에 소속된 카우보이들이 모두 동원되었다고 설명해 주었다. 얼른 내 눈짐작으로 여의도 광장만 한 초원에 여기저기서 몰려온 손님들은 이백여명이었다. 스페인 발렌시아식 빠엘라 점심을 포함해서 일인당 수백 프랑으로 일반적으로 개인에게 표를 팔지 않고 프로방스에 산재해 있는 큰 회사나 기관을 상대로 몇 달 전부터 목장주가 발행한 표를 판다고 한다.
그 이유는 우선 비상업적인 행사이고 또 목장마다 자기들이 하루에 받을 수 있는 부대시설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옛날 어느 경상도 시골 큰 지주집 잔칫날 기분을 내가 느꼈을 정도로 부엌도 따로 없고 헛간 같은 데서 임시로 큰 가마솥 비슷한 것을 차려 놓고 음식을 준비하는 광경을 보았을 때, 또 시중드는 여자들의 비상업적인 웃음이나 친절, 음식량, 질이 모두 풍성풍성하여 오랜만에 인심 좋은 고장에 왔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낙인제라는 것이 어떻게 진행되고 무엇을 구체적으로 하는 것인지 나는 한 번도 본적도 들은 적도 없기 때문에 상상할 수가 없었다. 열 시 반에 우리들을 목장 한쪽 귀퉁이로 모이라고 했다. 얼마 후에는 맞은편 일 킬로미터 저쪽 편에 열두 명의 카우보이들이 일열횡대로 백마, 흑마, 갈색 형형색색 미끈미끈한 말을 타고 서 있었다. 복장들은 존 웨인 식의 조끼, 모자, 모두가 볼만했고 드디어 이들 세찬 카우보이들은 어린 투우 한 마리를 몰아재끼고 있었고 그 소는 어리둥절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지그재그로 열두 마리 말굽 소리에 놀래 우리 쪽으로 피해 달려오고 있었다.
마침내 우리들 가까이 왔을 때는 목동들도 말에서 내리고 어린 소를 둘러쌌지만 워낙 사납게 설치는 통에 군중들은 여기저기로 물러서기도 했다. 다시 이쪽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말몰이군들과 합세하여 어린 투우의 다리를 포박하고 어떤 사람들은 뿔을 움켜 잡고 R (로씨 목장표시)이란 첫 글자를 시뻘겋게 달은 칼 같은 쇳덩어리로 소 허벅다리에 찍어 눌렀다. 다음은 오른쪽 귀를 이 센티미터 정도 칼로 잘라내는 일이었는데 그때마다 애 낳는 산모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그 비통한 소리가 크면 클수록 군중들은 만족해서 싱글벙글하는 일종의 새디즘의 한 극치가 일어나고 있었다.
끝나기 무섭게 소는 공포와 위협을 주었던 카우보이들로부터 풀려서 자기가 가고 싶은데로 뛰며 목장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져 버렸다. 불과 모두 한 시간 정도 걸렸을까 하는 참 싱거운 "굿"이다. 그러나 나는 처음으로 그런 구경을 했기 때문에 흥미로웠고 낙인제를 통해서 자유가 무엇인가를 또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까마르그 낙인제란 젊은 소들에게 국가가 정한 자연보호 지역내서면 어디서든지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방목시키며 R, K, S 등의 낙인을 찍힌 후에 완전히 자유를 누리는 상태를 인간으로부터 얻는 축제일인 셈이다. 즉 자유에 대한 값을 치른 셈이다. 한 순간의 저런 고통도 치르지 않고 어떻게 소의 일생인들 평생 그 값진 자유를 누릴 수 있느냐의 뜻인가 보다. 그래서 시뻘건 불로 허벅지를 지질 때도 군중들은 “자유제”라 생각하고 그렇게 좋아하고 웃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구경이 다 끝난 다음에 우리는 곧 식당이란 데에 안내되었는데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유쾌하게 보르도 주 잔이 부닥쳤다. 조금 있으니 누가 조용히 해달라는 신호를 했고 우리들의 시선은 일제히 그곳으로 몰렸다. 긴 치마와 옛날식 흰 블라우스에 조끼를 차려입은 목장주, 미인 롯씨부인이 나타나 인사를 하지 않겠는가? 아무리 뜯어보아도 소를 다루는 거친 아주머니 같지는 않고 어떤 성채 속에 사는 신비로운 귀족 부인 같은 분위기가 몸에 배어 있고 정갈한 언어며 조용함, 부드러운 제스처가 군중을 이상하게 휘어잡고 있었고 모두가 황홀하게 눈만 껌뻑이며 바라보고 있었다.
인간은 말과 행위가 없어도 존재하는 그 자체부터 가치로 인정되어야 한다던 내 친구의 말이 생각났다. 그렇다. 나도 가끔 일상 경험에서 아무리 화려하고 좋은 잔치에 가도 그 모임이 원하는 아무개가 빠지는 날이면 뭐가 텅텅 빈 것 같고 뭔가 잘못된 것 같은 느낌을 가졌던 적이 있다. 아마 오늘 로씨부인의 존재로 말하면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모든 구경꾼들이 만족할 만한 대상이다.
옆에 있는 이 지방 사람에게 불란서는 별로 투우가 성하지도 않고 여기 사람들 기질에도 별로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째서 이곳에 저렇게 많은 소를 기르느냐고 물어봤더니 인근에 있는 도시인 님므나 아를르 (옛날 로마 점령하일 때 만든 원형경기장이 있음) 같은 데서 철에 따라서 투우경기가 있긴 하지마는 스페인 같이 그런 큰 규모가 못되어 결국 스페인이나 남미 같은 투우국으로 수출하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설명한다.
프랑스 사람들은 점심 먹고 쉬는 시간이 꽤 길고 말이 많다. 식사 후에 우리 구경꾼들도 어린 투우처럼 이 목장에 자유로 풀어졌다. 오후 네시쯤 되니 다시 모이라고 했다. 헛간 같은 남불 프로방스 독특한 토벽으로 싼 텁텁한 담을 따라갔더니 조그만 원형 경기장이 나왔다. 그곳에서 목장 소속 말몰이군들의 묘기로 이루어진 소규모의 투우를 보여 주었다. 바로 두 시간의 이 "굿"은 지붕 없는 극장의 굿 중에 굿이다. 역시 제일 생생하고 가장 잘 어울리는 노천의 굿이 아닌가 생각된다.
프랑스 문학사를 들여다보면 굿에 대한 찬반론을 언급한 두작가가 있다. 까뮈와 룻소다. 까뮈는 “나는 왜 연극을 하는가”라는 제목으로 그의 연극에 대한 태도를 밝혔는데 첫째는 자기의 기호성, 둘째는 연극의 진실성을 들었다. 그의 말을 추려보면 글을 쓴다는 즉 혼자 해야 하는 고독한 작업에 비하여 연극은 여럿이 함께 일하는 행복한 장소라고 했다. 동시에 행복한 도피처로 생각하고 있었다.
"당신이 만약 페르낭델 (희극배우)이나 브로지드 바르도나 알리깡쯤 된다고, 아니 좀 더 겸손하게 발레리쯤 된다고 해보십시오. 그 어느 경우이던 당신의 이름은 틀림없이 신문에 나게 됩니다. 이름이 일단 신문에 오르내리게 되면 곧 귀찮은 일이 시작됩니다. '연습 중'이라고 문 밖에 표시를 해 두면 곧 그 어떤 감미로운 사막의 정적이 우리들 주변에 자리 잡게 됩니다. 내가 종종 그렇게 하듯이 낮 동안 하루종일 연습을 계속하는 피를 써 두면 밤의 한 부분은 솔직히 말해서 파라다이스와 같이 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극장은 나의 수도원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떠들썩한 소리들이 수도원 벽 밑에 와서는 사라지고 성스러운 성벽 속에서 두 달 동안 오직 하나만의 목적에 마음을 쏟는 작업 중의 수도사들 공동체가 이 세기의 번잡을 벗어나서 언, 날 저녁 처음으로 열게 될 그 제단을 준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그의 개인적인 생활 방법을 기술했으며 연극 본질에 대한 것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선 나는 연극이 어떤 진실의 장소라고 믿고 있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오히려 그것이 환상의 장소라고 흔히들 말합니다. 그런 말은 믿지 마십시오. 환상을 먹고사는 것은 오히려 사회입니다. 당신들은 분명코 무대 위에서 보다는 거리에서 더 많은 엉터리 배우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진실 속에서 살기를 원한다면 연극을 해보십시오."
무대가 진실의 공간이라고 함은 만들어 낸 대사가 분장한 배우에 의해서 표현되나 그것은 관객과 배우 사이에 “놀이”라고 공인된 공간에서 하는 거짓이기에 역설적으로 말하면 까뮈가 말하듯이 그 이상 진실한 공간도 없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반하여 그 공간이 가장 허위의 공간이라고 주장하며 세상의 많은 자연성과 평등성을 파괴하는 것이 연극이라고 불평한 작가는 "자연으로 돌아가라”라고 고성을 울린 장 작끄 룻소이다. 자연만이 인간을 선량하게 자유롭고 복되게 만들며 사회라는 것은 인간을 악하게, 노예 상태로 불행으로 이끈다고 믿은 그라면 스펙터클에 관한 편지 (Lettres sur les spectacles)의 주된 명제도 결국은 반연극임이 자명하다.
물론 개인적인 인간관계는 연극에 열을 올렸던 볼떼르와 문명이란 것에 정열을 쏟던 백과사전파들에 대한 반감도 있었지만 쥬네브 출신인 그는 연극은 비자연적이고 관중과 배우가 제한된 공간에서 함께 참여할 수 없는 점을 지적하고 반대로 카니발 같은 것은 모두가 참여할 수 있어서 자연적인 면을 가지고 있으며 연극이 인공적인데 비해 자연적인 자유가 있다고 주장했으며 쥬네브에 극장 세우는 것을 극히 반대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연극이란 정직한 것이 아니고 악이나 비속함을 불어넣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이 희극일 때는 더 그렇다고 했다. 몰리에르의 예를 들면서 몰리에르와 그의 애호가들의 정신에 덕이 존재하지 않고 기껏해야 악습을 희롱하는 자들이라고 비난했다.
룻소는 경제, 사회, 문학, 여러 측면에서 옥내 연극과 무대라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던 작가다. 십팔세기의 그의 설득력 있고 논리성 있는 호소에도 불구하고 이십일세기 오늘날 세계 극장과 연극, 옥내무대가 없는 곳이 없고 보면 우리는 까뮈편 취향에 살면서 동시에 자연무대인 노천극장의 향수에 머물고 있는 셈인가. 그리고 자연의 향수를 가지면서 어쩔 수 없이 도식화된 극장이란 공간을 즐기는데 편안함이 있는 것일까.
룻소가 무덤에서 살짝 빠져나와 런던이나 빠리 극장가를 들러 화가 치밀었다가 지중해안 어느 노천극장에 와서 연극이나 오페라에 참석하고는 반쯤 한이라도 풀렸을까 하고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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