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향
어떤 불행한 사람들에게는 고향이 없는 경우가 있다. 가령 미아로, 걸인으로, 포기된 아이로 자란 사람들에게는 지리적 고향에 대한 연연한 감정이 없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에게나 유년 시절이라는 시간적 고향이 있는 법이다. 우리는 고향이라는 이 평범한 말 앞에 가장 오래된, 내밀한 추억들이 오색 무지개되어 피어오른다. 어른은 누구나 잃어버린 유년 시절이라는 시간적 고향이 있는 법이다. 어른은 잃어버린 유년 시절에 강렬한 향수를 느끼고 살아간다. 그래서 많은 천재 예술가들은 시간을 질투하고 도전하기도 한다.
다행히 나에게는 태어나고 자란 고향도 있고 유년 시절도 있다. 또 나에게는 고향이라는 말과 가장 친화력 있는 두 얼굴이 있다. 어머니 와는 또 다른 종류로 나의 깊은 무의식 속의 안식의 의미로 늘 존재했던 분들은 친가, 외가의 두 할머님들이시다. 이미 두 분 다 다시 뵐 수 없는 먼 곳에 계시지만, 생전의 그들의 표정, 언어, 동작들이 생생 하게 내 기억 속에 녹음, 녹화되어 있어서 버튼을 누를 필요도 없이 내가 원하면 언제든지 어디서나 보고 들었던 모든 것이 자동 재방영된다. 이토록 어린애의 기억력이란 어떤 성능 좋은 컴퓨터, 녹음기, 사진 필름보다 더 정확하고 영구적이며 편리한 것이다.
어느 날, 나는 대학에서 한 여학생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인생에서 첫 번째 사랑이 왜 두 번째, 세 번째 사랑보다 더 중요하다고들 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그 답변으로 상징적인 예를 하나 들어주었다. 새 녹음테이프를 사용할 때 음질이 깨끗하고 잘 녹음되나 두세 번 계속 사용하게 되면 잡음이 나고 소리가 깨끗하게 들리지 않는 것과 같이, 우리 인간의 감정과 기억도 처음 경험이 더 강하게 느껴지고 있으나 그것이 반드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큰 가치라고만은 말할 수 없다고 대답한 적이 있다.
그렇다. 유년 시절은 개개인에게 생생한 기억으로 항상 존재한다. 나에게는 늘 두 할머님의 추억이 많다. 우연히도 두 어른께서는 똑같이 83세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런대로 복 받으신 노인들이었다고 들 한다. 두 분 다 좋은 가정의 처녀들로 시집와서 부모님, 남편 섬기는 일, 자녀 기르는 일, 살림 꾸리는 일에 골고루 능력을 발휘하셨고 또 사랑받으셨던 미인들이다. 두 사돈 마님은 저울에 달면 막상막하였는데 어린 내 눈에도 나의 친할머니는 외할머니보다 돈이 많은 부자셨고 목에 약간 힘주는 형이라면, 외할머니는 친할머니보다 교양이 높고 유식하셨으며 아주 유연하신 분으로 비쳤다.
두 분은 가끔 서로 예의적인 방문도 하셨고 대청마루에 적당한 간격으로 점잖게 담뱃대를 물고 웃으시며 담소도 나누셨다. 나는 옆에 앉아서 두 분의 말씀의 뜻도 잘 모르면서 눈을 껌벅거리며 이 얼굴 저 얼굴을 번갈아가면서 바라보곤 했던 기억이 있는데, 주로 화제를 엮어 나가는 쪽은 외할머님이셨고 듣고 장단 맞추는 쪽이 친할머님 쪽이란 것쯤은 알아차렸다. 친할머님은 내가 첫 손녀였기 때문에 아래 남자 동생과 같이 대단히 귀여워해 주셨다. 그래서 입는 것, 먹는 것, 자는 것, 이런 일상과 관계되는 것은 모두 할머니 소관이었고 어린 나를 돌봐주시는 일과 놀아 주시는 일을 기꺼이 즐겨하셨던 것 같다.
어린 나이에도 그런 일상적인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지 나는 가끔 외할머님께 일상이라는 궤도를 벗어나는 것을 은근히 기대하면서 외가에 가기를 좋아했다. 외할머니는 숙영낭자전, 춘향전, 심청전, 한중록... 등 옛날 소설 몇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줄줄 외고 계셨던 재주꾼이셨다. 그 레퍼토리가 다양했고 음독(音讀)하실 때 음의 고저와 표현이 풍부하셔서 현대식으로 말하면 성우 같은 효과를 잘 내셨다. 그래서 나는 어릴 때 할머님이 피곤하셔서 얘기의 순서가 약간 바뀌든지, 작중 인물의 이름이 잘못 발음되면 금방 내가 수정할 정도로 숙영낭자전은 수십 번 들었고, 심청이의 효심을 슬픈 음성으로 들려주실 때는 눈물을 찔끔찔끔 흘렸던 기억도 있다. 겨울 긴긴밤에는 할머니의 소설 낭독으로 잠이 들었을 때가 많고, 여름밤에는 살평상에 누워서 총총히 박힌 별들을 바라보며 옛날이야기를 듣다가 잔 적이 많았다.
이렇게 나의 외할머니는 나의 경외심의 대상이며, 꿈을 불어넣어 주시는 매력 있는 분으로 늘 존재해 주셨다. 지금 생각하니 친할머니 쪽은 외할머니 앞에서 약간의 지적, 문화적 콤플렉스를 가지셨던 것 같다. 특히 영리한 아이였던 나는 외할머니가 더 좋았고, 그 어른과 함께 있는 시간에 더욱 행복감을 느꼈다. 이렇게 나의 유년 시절이란 시간의 고향은 평화롭고 풍성하여 아름다운 꿈을 먹고 지냈다. 이런 보고(寶庫)를 소유한 자부심이 내 속에 늘 영양소로 버티고 있었던 덕으로, 살면서 여러 어려운 고비 앞에서 쉽게 실의에 빠지거나 칩거해 버리거나 쉽게 슬퍼하지 않았으며, 누구를 크게 미워하거나 질투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 나는 두 아이의 엄마이다. 거기다가 두 아이들이 모두 외국에서 자라고 있기 때문에, 나는 그들 유년 시절에 할머니에게 칭얼거리게 하고 치댈 수 있는 '스킨십'을 돌려주지 못한 죄책감에 늘 사로잡힌다. 할머니가 없는 유년 시절과 고향은 유행가 가사처럼 불 꺼진 항구이며, 오아시스 없는 사막 격이다. 나는 외할머니로부터 많은 문화적, 정신적 소양을 얻었다. 나에게는 고향이란 말이 마치 할머니라는 말의 동의어로 느껴진다. 아이들이 어른 세계를 얼마나 정확하게 기억하는가를 생각하고 할머니에 대한 나의 최초의 경험들을 추억하며 시를 써 본다.
카메라
망가지기 전 활짝 핀 꽃으로 덮인
절경 앞에서 '찰칵' 한 장 찍는다.
맵시 있는 세련된 인간, 풍물과 또 한 장
허물허물 정이 들어 버린 어수룩한 사람과도
잊고 싶지 않은 역사의 현장과도
수시로 카메라는
현재란 공간을 정지시킨다.
그뿐인가 체내 속속들이 찍어 내는
엑스레이는 어쩌고,
명암 원근법을 가르치던 미술 선생님의 것에서
음각 양각의 장인
더딘 일손도
카메라는 이제 다 훔쳐 냈지만,
아직 못다 한 노략질 남아 있어
그놈 몸살하고 있는 줄 알고 있다.
'영혼'이라는 것 말이다.
사진첩에 담긴 웃고 있는 얼굴에
비탄과 고독이 층층이 쌓인 숨겨진 통증
악취 고인 심장에 향수 뿌렸고
마음 같은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탐욕덩어리로 굳어져 버린 얼굴,
한 번도 가슴앓이나 고뇌를
쳐다본 적도 없이
위험을 무릅쓰고 한 생명을
구해 보려고 땀 한 방울 흘려 보지 않는
몰염치한 저들,
보기에는 대리석 완성품처럼 매끈하고
무게 있어 보이는 어른, 우리.
오늘따라 유난히 커 보이는 눈으로
움직이지 않는 인형처럼
유심히 쳐다보고 있는 아이들의
무섭도록 맑고 고요한 동공 속에
만상의 원형질에 정확한 초점을 맞추어 찍어 내는
비범한 특수 촬영기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면
까무러치게 놀라고 정직한 포즈를 취해 주어야 한다.
열심히 사는 삶을 찍게 해주어야 한다.
영혼을 들여다보는 안목과 염탐술은
하느님과 아이들뿐,
하느님 나라에는 고해성사 제도가 있어
관용이란 것이 있지만
아이들 나라에는 외곬 시인처럼
덤으로 주고받는 흥정이란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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