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칼라의 얼굴들
나에게 그해 1년 동안의 빠리 체류는 더없이 풍성한 축복의 한해였다. 떠나기 전에 나는 많은 계획을 세웠고, 욕심껏 살리라고 마음먹었다. 막상 일 년을 지나고 보니, 그렇게 만족할만한 연구는 해낸 것 같지 않으나 평소 때 늘 즐겨하던 좋은 음악무대와 음악가들의 공간을 두루 찾아본 것들이 연구생활 외의 큰 소득으로 남은 것 같다.
많은 시간을 통해 유럽의 중요한 오페라를 감상했던 날들은 나에게 지금도 보석처럼 빛나며, 가장 생생하게 살아있는 '사랑의 시간'이라고 말하고 싶다. 오페라 시즌에 들어서면서 가수들과 연출가들에 관한 각종 정보를 읽어보고 가고 싶은 오페라가 결정되는 순간부터 날짜를 정하는 일, 표를 사는 일, 누구와 더불어..., 의복을 선택하는 일 등등 모두가 출렁이는 물결처럼 내 속에서는 설레는 축제의 감정으로 이어진다.
어린애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손꼽아 그날이 기다려진다. 이른 봄 불란서 음악잡지와 신문에는 티지아나 파브리치니(Tiziana Fabbricini)라는 생소한 이름의 젊은 이태리 여가수에 대한 기사가 크게 보도되었다. 내용은 20년 이상 스칼라(Scala) 무대의 프리마돈나였던 마리아 칼라스가 1977년에 빠리에서 사라진 뒤 "춘희”의 비올레타 역을 칼라스처럼 훌륭하게 해내는 역량 있는 가수가 없어 온 이태리인들이 슬퍼하고 허전하던 차 드디어 교향악단장직까지 포기하고 리카르도 무티 (Reccardo Muti)는 비올레타 발굴작업에 개가를 올렸다는 얘기였다.
나는 그 기사를 읽는 순간부터 스칼라의 떠오르는 '샛별의 무대'가 보고 싶었다. 학교에 있는 사람은 언제나 방학이라야만 심신의 자유를 가지게 되기에 방학이 되기를 기다리며 표 예약을 알아보았으나 이미 빠리에서는 동이 나버린 후였다. 나는 몹시 난감했으나, 옛날 밀라노의 현장에서 당일 암표를 샀던 경험을 기억해 내고 일단 7월초 티지아니 파브리치니 공연일에 갈 것을 정해 놓고 무슨 일이 있어도 그날 밀라노에 도착하리라 마음먹었다.
드디어 그날, 오후 4시에 밀라노에 도착하여 호텔에 짐을 풀자마자 스칼라극장 앞으로 갔다. 극장 소속 박물관이 오후 5시까지 개관하기 때문에 낮에도 사람들이 붐빈다. 나는 빠리, 런던, 베를린 같은 도시에서도 가끔 표를 미리 구하지 못했을 때 극장 입구에서 구한 적이 있다. 거기서는 표를 사놓고 사정이 생겨 입장하지 못한 사람들이 다시 파는 경우가 있는데 돈을 더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태리는 다르다. 돈만 더 주면 어디에 숨겨놓았는지 표를 내어준다. 익살스러운 건달 같은 남자와 옷을 아주 허름하게 입고 때가 많이 낀 것 같은 넥타이 없는 흰 와이셔츠를 입은 남자가 내 앞에 다가서면서 오늘밤 표를 원하느냐고 물었다. 나도 그들이 암표꾼이란 것을 어렴풋이 짐작했지만 그들도 내가 표를 원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보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8시가 가까워지는 스칼라 주변 거리에서는 걸음 속도를 늦추면서 머뭇거리듯 극장 입구에 선 입장자들의 동작이나 멋있게 차려입은 남녀들을 슬쩍슬쩍 훔쳐보아도 즐거운 일이 될 수 있다. 축제 분위기의 극장 입구를 통과하는 순간 상냥하게 프로그램을 팔고 있는 큰 십자가가 붙은 묵주를 목에 걸고 검은 수단(soutane)을 입고 있는 신부들을 만나게 되고 또 그들로부터 좌석 안내를 받게 된다. 물론 신부복을 입었다고 해서 그들에게 적당한 팁을 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막이 오르기 전 나는 '신부들'의 멋있고 우아한 안내를 받은 후감이 은근히 나쁘지 않아 한참 동안 극장 내를 오가는 그들의 동작을 즐거운 눈으로 따르고 있었다.
극장 안내를 남자에게 맡기고, 가톨릭 국가답게 사제복을 입힐 수 있는 이런 재미있는 발상이 바로 이태리인들의 예술감각이나 창의력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세계 어느 오페라 극장에서도 저렇게 용모 수려하고 신부복을 점잖게 입은 세련된 매너를 갖춘 젊은 남자들이 안내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들에게서 로씨니, 벨리니, 도니쩨티, 베르디의 조상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살고 있는 현장의 일꾼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이태리인 아니 온 세계의 오페라 애호가들에게는 신의 존재를 방불케 하는 베르디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인기 작품 중의 하나이며 특히 비올레타의 역량의 성공을 좌우하는 “춘희”를 스칼라에서 한 번쯤 보고 싶은 것이 많은 사람들의 소망이리라. 막이 서서히 오르면서 비올레타의 비극적인 슬픔과 알프레드와의 이별을 상기시키는 멜로디가 흘러나오고 사진에서 보면 북이태리 미남으로 보이는 무티의 지휘봉 동작 하나하나에 2천 명이라는 다양한 국적, 취향, 개성의 집합체인 관중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순간순간 그 공간의 모두는 신비스러우리만큼 숨을 죽이고 어떤 일체감으로 몰입된다.
1853년 베르디의 나이 40세에 작곡한 "춘회"는 초연에 실패를 했다. 그러나 90년대 까지 스칼라의 비올레타 역이 젊은 소프라노 가수들로 이어지면서 그중에서도 마리아 칼라스의 무대를 “세기적인 춘희"라고 부를 만큼 절정이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음향 장치가 거의 완벽한 스칼라 극장, 140명의 악사, 17명의 전속 무용수로 구성된 이 대단위 예술 가족이 이루는 그날 밤 최고 시간은 역시 4막에서 초췌한 모습으로 이 세상의 마지막 비극적인 이별을 고하는 Addio! del Passato를 감동적으로 부른 다음 사육제의 고조된 분위기와 대조적으로 알프레도가 도착하면서 두 주인공이 사랑과 그리움을 노래하며 “Parigi, Ocara"를 이중창으로 부를 때다. 나도 모르게 가슴에 물기가 젖어오는 것 같았다.
티지아나 파브리치니의 그날 밤 연기나 음악성은 비전문가인 내 눈에는 그 이상 더 무엇에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되었지만 목소리가 몇 군데서 약간 갈라지는 듯 허스키 소리가 나왔는데 연습을 너무해서 쉰 것인지 본래 음성이 그런지 모르겠다. 나는 그녀의 오리지널 무대를 본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날이다. 오페라의 대중화에 앞장서는 불란서 대통령이 있다 하더라도 “오페라는 역시 오페라다"라고 함은 그 관객들의 수준, 분위기, 매너, 차림새... 등의 높은 질을 요구하는 오페라와 대중성이라는 양과의 함수관계를 조화시키는 일이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시사하는 말인 것 같다.
베르디의 개인적인 비극이긴 하지만 그토록 사랑했던 첫 부인 마게리타와 딸 비르지나, 아들 이치리오가 베르디가 27세도 되기 전에 모두 병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병든 비올레타를 위해 작곡할 때 얼마나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겠으며 동시에 얼마나 실감 나게 쓸 수 있었을까를 상상해 보았다. 1840년 가을, 크나큰 불행 뒤에 고독과 허탈 속에서 스칼라 극장 건너편에 있는 두오모(Duomo) 광장을 실의에 차서 산책을 하는 젊은 베르디를 그려보면서 나도 모르게 늦은 밤인데도 서서히 발길은 그쪽으로 가고 있었다.
이미 극장에서 나온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한잔을 하고 있었고 스칼라의 불멸의 얼굴들에 대한 얘기로 꽃을 피우는 듯했다. 다음날, 베르디의 고향인 부세토와 그의 별장을 보러 떠날 예정인데, '두오모' 산책에서 나오는 순간 갑자기 줄기찬 소나기가 쏟아지는 바람에 모처럼 차려입은 고운 치장들이 비바람 치고 간 뒤의 흉한 장미꽃처럼 다 망가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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