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령 져지 섬의 침묵
져지 섬 (jersey island)에 가 본 한국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곳이 우리말로 소개된 적도 없고, 그렇다고 돈을 벌 수 있는 곳도 아니다. 거기에 가려면 빠리나 런던을 관광하는 사람들이 다시 비행기나 배를 이용해야 하는 교통상의 불편이 따르기 때문이다.
프랑스 서쪽 땅에서 20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니 영국보다 프랑스에 훨씬 더 가까운 영국 영토이다. 얼마 전 가고 싶어 했던 그곳에 발을 들여놓았다. 런던에서 그곳까지는 경비행기로 40분 정도 걸렸다.
비행장에 내리자 소개 책자를 열심히 읽어 대강 감을 잡고 있었던 나는 곧장 해변의 그랜드 호텔이란 곳에 짐을 풀었다. 이 섬은 '영국의 제주도'격이다. 무슨 이유인지는 잘 모르지만 은행가가 굉장히 활발하고 면세 지역이다. 그리고 나폴레옹 치하 때 빅토르 위고가 그의 애인과 더불어 19년간 이 섬과 게르느지 섬에서 귀양살이를 했던 곳이기도 하다.
성 헬리어 구에 있는 퀸 스트리트, 킹 스트리트니 하는 중심가를 걸어 보았다. 118평방 킬로미터의 섬에 10만여 명이 살고 있는 이곳에 1년에 70만 명이 넘는 손님들이 찾고 있다니 그 많은 인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따라 햇빛이 꽤 여유 있게 하늘에 머물고 있어 모든 사람들이 거리나 바닷가에 쏟아져 나온 듯한 느낌이었다.
아주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때의 사람들의 풍경이다. 어디를 가나 유럽은 대개 유색인들이 섞여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하루 종일 걸어 봐도 그 흔해 빠진 일본 관광객 한 사람도 볼 수 없어 이상했다. 그림처럼 펼쳐져 있는 해변의 사장이나 카페에는 햇빛을 즐기는 많은 영국 사람들이 가족들이나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와 있었다.
그런데 정말 나를 놀라게 했던 것은 그들이 즐기고 있는 침묵이었다. 그때 그 침묵은 그 공간의 품위이며 모양 좋은 사치이고 멋이 되고 있었다. 모두가 조용히 앉아서 마시거나 먹으면서 들릴락 말락 한 음성으로 담소하고 있었다. 서양 사람 특유의 그 제스처도 거의 없었다.
시끌시끌한 프랑스 까페 분위기에 익숙했던 나에게 그 조용함이 신기롭게까지 느껴졌다. 그때 나는 언어로 감싸인 프랑스 인과 제스처와 잘 싱글거리는 이탈리아 사람을 상기했다. 그리고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우리나라의 경우를 생각했다. 나는 소리의 공해를 크게 실감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랫동안 객지에 돌아다니다가 다시 돌아오는 순간 소리 때문에 신경이 몇 번이고 날카로워졌던 일이 있다.
요즘은 다행히 시민의식 수준이 많이 향상되었다고는 하나 한때는 새벽 청소차가 불러대는 동요 소리에서부터 눈을 뜨면 온종일 소리에 시달리기도 했다. 동네를 돌아다니는 잡상인들의 소형 트럭에 매달아 놓고 반복 녹음된 호객 소리, 고속도로 휴게소의 스피커에서 나오는 시끄러운 대중가요 소리, 선창가 배표 파는 곳의 마이크 소리, 지하철 안에서 남의 눈치를 보는 것도 없이 마구 떠들어 대는 휴대폰 통화 소리...
조용해야 하고 사색해야 하며 학문만이 건재해야 할 대학에서까지 운동장 곳곳에서 들리는 방송 시설, 어느 음악회 날 공연장의 삐걱거리던 의자 소리, 유난히 희로애락의 표현을 큰 소리로 표현하는데 습관화된 시민들의 목소리들… 정말 피곤하고 견디기 힘든 공해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오랫동안 소리의 문화에 너무 무관심하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져지 섬의 '영국 사람들의 침묵'은 거의 시적인 아름다운 침묵이었다. 우리는 항상 웃을 수도 없고 항상 울고 있을 수도 없다. 우리에게도 가끔은 그 시적인 침묵이 적당히 존재해 줄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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