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아테네에서... ( 3 )
내가 잘 알고 있는 대부분의 남불(南佛)의 바다에서는 몇몇 해안을 빼고는 밤 수영이 불가능하다. 추위를 잘 타는 체질로는 낮에 발을 집어넣어도 얼어붙는 것 같은 곳도 있고 일반적으로 그 고운 쪽빛 물빛에 비해 한 여름 며칠을 빼놓고는 물이 좀 찬 것이 험 이라고들 하며 수영꾼들도 밤에는 감히 여간한 심장으로 뛰어들지 못한다. 그래서 꼬따쥐르(南佛 쪽빛 해안)가 팔등신의 나무랄 데 없는 미인으로 낮에 그토록 열광토록 유혹한 뒤 홱 돌아서 버린 사내들에게는 잔인하도록 마음 헤픈 새침한 처녀라면 에게해의 물결은 밤이고 낮이고 따뜻하게 받아주는 누이요 애인이요 어머니다. 여기서는 푸근한 한국여인의 치마폭 같은 넉넉함을 느끼게 된다.
엷은 슬픔과 꿈이 함께 서려있던 고대 그리스인의 유품들을 넋을 잃고 보고 다니느라 바다와 인사할 시간이 없었던 것을 아쉬워하고 포항출신인 내 친구의 미끈한 수영 솜씨와 기껏 물에 뜨는 나와는 도대체 물속에 어울리는 한 쌍이 되기에는 어렵고 거기다가 밤 수영이란 것을 상상도 못 했으므로 수영복도 준비가 없었지만 브래지어와 팬티바람으로 별 주저함 없이 풍덩 뛰어 들 정도였다면 얼마나 많은 인어(人魚) 떼들이 그때 놀고 있었는가를 상상해 보라.

태양의 조명이 없을 때는 소위 비키니라는 것과 우리의 속옷과 차이가 무엇이 달랐겠느냐. 기분 좋을 정도의 따뜻한 물결 속을 헤쳐나가고 있을 때 은은한 소금냄새를 맡으며 끝없이 가도 밤 인어(人魚)들이 놀기에 전혀 위험이 없는 물깊이, 문득 나는 까뮈의 페스트 소설 중에 닥터 류와 타아루 의 장면이 아닌가 착각할 정도로 오랜 시간의 때가 묻은 비밀의 시간 우리의 우정 (友情)의 뜻을 음미하면서 얼마동안을 즐겼다.
페스트를 읽은 독자는 누구든지 그 중요한 장면에서 '이상한 행복' 연대의식, 뭉클해지는 남자들의 침묵 속에 가려진 긍정적인 관계, 이런 좀 거창한 것들을 상기하게 될 것이다. 북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으로 들어가려면 만나야 하는 도시 오랑(Oran) 시가 무서운 페스트의 전염으로 온 시민이 공포와 죽음의 아우성, 구급차의 고동 소리가 한창인 그곳에서 치료를 담당하는 의사 류와 자원 보건대원으로 있던 타아루라는 청년이 많은 것이 금지된 지역에서 빠져나와 그들의 특수 통행증으로 방파제까지 이르러서, 이런 극한 상황과는 아랑곳없이 '우유 빛깔의 하늘이 도처에 엷은 그늘을 투사하고 있는' 밤이 무르익고 있는 바다의 품으로 뛰어든다.
"그들은 옷을 벗었다. 류가 먼저 물에 몸을 잠갔다. 처음에는 차갑던 물이 다시 떠올랐을 때는 미지근한 것 같았다. 평영을 몇 번 한 뒤 그날 저녁 바다는 여러 달 동안 축적됐던 대지의 열을 되찾아, 가을바다의 온도를 간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규칙적으로 헤엄쳤다. 발을 풍덩거릴 때마다 그의 뒤에는 하얀 물거품이 남고 물은 두 팔에서 흘러내려 다리에 가서 철썩 붙곤 했다. 묵직하게 풍덩하는 소리로 타아루가 뛰어든 것을 알았다.
류는 배영을 하며 움직이지 않고 달과 별들로 가득 찬 하늘을 거꾸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길게 숨을 내 쉬었다 다. 그러자 점점 뚜렷하게 밤의 침묵과 적막 속에서, 신기하게도 역력한 물 튀기는 소리를 들었다. 타아루가 가까이 다가오고 이윽고 그의 숨소리까지 들리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친구와 나란히 같은 리듬으로 헤엄을 쳤다. 타아루는 그 보다 더 힘차게 전진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속도는 느려야만 했다. 몇 분 동안 그 들은 같은 장단, 같은 힘으로 단 둘이서 세상을 멀리 떠나, 마침내 시(市)와 페스트에서도 해방되어서 전진했다."
류와 타아루가 밤 수영을 한 오랑의 바다나, 선임이와 내가 떠다녔던 에게해 (Aegean Sea) 물은 다 미지근했다. 혹시 우리의 무의식 속에는 태어나기 전에도 어머니 뱃속 적당한 온도의 물주머니 속에서 어려운 세상살이와는 아랑곳없는 안전지대에서 헤엄치고 살았다고 생각하면서 일종의 향수를 느끼고 있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아이를 가졌을 때도 내 아이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는지 또 누구를 닮을지는 몰랐어도, 적어도 열 달 동안 내 뱃속에서 살아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는 가끔 배를 만져보고 아이가 물집에서 수영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짚어 본 기억이 있다.
그렇다. 적어도 수영을 하는 순간만은 세상 풍진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수영을 하면서 거부들이 전자계산기 위 숫자를 생각하지 않을 것이고 고고하게 학문을 어렵게 얘기하기 좋아하여, 그것이 마치 자기 혼자만의 소유인 것처럼 착각하고 신비감을 돌게 하는 어떤 학자의 아류들이나 위선자들이 목과 어깨에 힘을 주지 않을 것이고, 외국 명문대학에서 따낸 박사라는 화려한 배지도, 장군들의 어깨에 붙은 무거워 보이는 별들, 권력가들의 장기집권을 위한 수뇌 공작회의 같은 것은 적어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수영이야말로 어머니 태반에서부터 하는 최초의 동작이며 그것은 배운다든가 어떤 규칙에 의한 동작이 아니라 가장 자유로운 동작이며, 물속에서만 이루어지는 바다라는 대자연의 교향악, 한 파도가 또 다른 파도를 초대하고 저 발아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조개가, 소라가, 혹은 거북이가 저음의 숨소리로 반주(伴奏)하는 그 리듬과 더불어 우리 인어들은 관객의 박수, 인공의 무대도 필요 없이 흥겹게 흥겹게 춤을 추고 있는 셈이다. 나의 형이상학적인 풀이로는 수영은 가장 자연스러운 춤이요 이 춤은 그토록 온 생명들이 갈구하는 적나라한 자유라는 높은 뜻을 지닌다.
류와 타아루도 얼마 동안은 그 지긋지긋한 페스트와 오랑시에서 해방을 느꼈다. 아마 내 친구 선임이도 수십 년 전 한 푼 없이 미국이란 땅에 떨어져 거부가 될 때까지 골몰했던 과거, 그리고 지금은 그 많은 돈을 흘리지 않으려고 유지하는데 대한 관리의 집념, 2세들을 자기와 같은 고통의 시간에서 면제시키고 싶은 보편적인 강렬한 모성, 아메리카라는 고도의 기계화된 유물 만능사회에서 잠시도 계절을 앓는다든가 하는 감상적인 병을 앓을 염려와 짬이 없다는 도시성(都市性), 그리고 나의 가난한 유학생활의 고달픔, 두 어린것들을 잘 길러야 한다는 한 어미의 원초적인 처절한 모성애가 담긴 시름, 동시에 학위 논문을 빨리 끝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적어도 짧은 시간이었으나 그 바닷속에서는 무한한 해방감을 느꼈을 것이 분명한 일이다.
우리는 얼마나 이 자유라는 것을, 해방이라는 것을 갈구하고 살았는가. 살면서 우리는 얼마나 질서에, 도덕에, 인습에, 사랑에, 의무에 얽매이고 살았던지 바로 이것이 진정 자유라는 것이다라고 느끼는 순간 한꺼번에 쏟아지는 햇살에 눈부셔하는 장님처럼 그것이 마치 인생의 덤의 시간 같아 시행착오에, 광기가 동반될 때가 많다. 나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까뮈를 읽을 때마다 얼마나 알제리에 가고 싶어 했는지 모른다. 봄이면 암병과 장미의 향(香)이 물씬하고 불그스레한 대지에 온 생명이 활력소를 머금고 폐허의 석관들도 다사로움으로 빛난다는 티파사(Tipasa), 거기서 자란 내 친구 알랭에 의하면 티파사의 공동묘지가 너무나 아름다운 꽃으로 덮여 죽음의 공포는커녕 그의 젊은 어느 날 죽음의 유혹까지 느껴 보았다는 그곳!

아! 그런 자유까지 우리는 언제 누리나? 이렇게 끝없이 욕심부리는 자유를 위해서 나는 무엇을 지불해야 하나 무엇을 준비해야 하나 스스로 자문하면서 우리는 온통 젖어버린 속옷을 슬쩍 블라우스와 폭넓은 치마로 덮어 감추고 호텔 로비를 지나 층층계를 스며들듯 밤을 뚫고 조심 스레 올라갔다. 우리의 덜그럭 거리는 소리가 복도의 평화로운 침묵을 방해하는 것이 무서워 아직도 바다소금 냄새가 온몸에 풍겨나는데도 피곤해져 버린 육체 위에 쏟아지는 잠을 그냥 받았다. 아테네에 대해서는 위의 소설에서 과거 1억의 인명을 빼앗아간 적이 있는 수십 회에 걸친 페스트 재앙 기록에 엑스, 마르세이유, 아테네의 극한 상황을 끔찍하게 묘사해 놓은 데가 있다.
"페스트에 휩쓸려서 새 한 마리 볼 수 없게 된 아테네 썩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시체들을 구덩이 속에 쳐 넣고 있는 마루세이유의 복역수들, 페스트의 무서운 바람을 막을 프로방스지방의 거대한 토벽 (土壁)의 건축, 자파와 그 도 시의 추악한 걸인들, ⋯루쿠레티우스가 말한 바 있는 페스트에 휩쓸린 아테네 사람들이 바다 앞에 세워 놓았다는 그 화장터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밤에 거기에 시체를 가지고 갔는데 장소가 비좁아서 생존자들은 자기들과 가까운 사람들을 거기에 놓으려고 서로 횃불로 때리고 싸웠으며 시체를 팽개치고 가기 싫어서 피를 흘리며 다투었다는 것이다. 고요하고 어둠침침한 바다 앞에서 시뻘겋게 타오르는 화장터와 불꽃이 반짝이는 어둠 속에서의 횃불싸움, 그리고 침착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하늘을 향해서 솟아오르는 독기에 찬 짙은 김..."
이런 기록을 상기하면서 나는 모든 사물의 표리의 관계, 「왕국과 유배지」를 상기해야 했고 내가 거닐고 그토록 행복감에 젖었던 이곳 해변 모래밭에 시체의 산더미가 재로 변해갔다는 그 옛날, 그렇게 푸르고 탐나는 처녀처럼 싱싱함으로 살아있는 저 물결, 그 근처 깨끗이 차려진 노란 레몬과 해물, 우리의 마음을 끌던 그곳의 하늘이 시뻘건 불길로 쌓였고, 죽음의 냄새가 천지를 진동했다는 그 장면을 상상했다.
그래도 나의 아테네의 짧은 체류가 행복한 것이 자명함은 기억이라는 단순하고 멋 대가리 없는 컴퓨터적인 시공 (時空)에서 머물지 않았고 적어도 같은 두뇌가 하는 일 중에서도 "상상의 세계"에 심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모든 주기적인 궤도의 생활을 벗어나 멀리 떨어져 살던 그리운 사람에게 달려가 올림프스산 같이 건장하고 에게해 바다같이 넓고 깊은 가슴속에서 감미롭고 행복하기만 한 시간 이란 비단을 짜낸 것 같다. 그러나 미지의 보물섬 같은 크레타에 못 가본 것은 아직도 아쉽다.
Love, Hope, and Joy, alike adieu!
Could I add remembrance too?
(사랑이여, 희망이여, 기쁨이여 모두 잘 있거라
추억이여, 너에게도 잘 있거라 인사할 수 있다면)
그 누군가 봄을 두고 한 번쯤 앓아본 경험이 없는 여인은 부끄러움이라고 했듯이 아테네를 걸어보고도 시(詩)한 수 읊을 수 없는 문학도 역시 부끄러움이라는 생각이 들어 나중에 비엔나로 향해 날고 있는 비행기 속에서 다음의 구절들을 기록해 놓았다.
지중해 순례
-아테네에서-
구겨졌던 시간
다시 펴낸 위에
일광욕을 즐기는 그리스는
반쯤 태운 몸체
회암석 반점되어 졸고 있다.
접어둔 옛 싸움터
숨 가빴던 슬픔들이
두루마리 서한 되어
잔잔하게 읽어내리는
에게에의 낭송에
감동으로 떨고 있는 나는
신라로 답송한다.
백제로 답송한다.
神殿의 층계를 지나가는
오렌지 향기 여울에
눈을 뜨는 폐허여,
이마에 돋은 땀을 닦고
설친 잠을
또 한차례 청하려는가
연륜을 업고 있는
암산의 감람나무는
추억하는 일도
서둘지 않고
담담히 살아 넘긴다
신라의 석불처럼
널려진 돌잔치에
초대된 나 위해
시를 푸는가
춤을 푸는가
웅변을 토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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