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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런던 디킨즈 기념관, 영국

by 이 다인 2025.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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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디킨즈 기념관, 영국


금년 2월에 접어들면서 1마일쯤 뻗어 있는 런던의 리젠트 거리의 화려한 쇼윈도는 벌써 봄을 불러내기에 바쁜 모습이었다. 아마 올해는 병아리 같은 연노랑과 초록색이 패션계를 주름잡을 색상인가 보다라고 생각하며 완전히 봄이 와 버린 것 같은 착각 속에 거리를 걸었다.

그런데 피카디리 지하선을 타고 러셀 정거장에서 내려 다우티 스트리트(Doughty Street) 48번지 주소를 들고 한참 헤매는 동안 문득문득 아직 차갑고 매운 겨울을 나는 느껴야 했다. 마치 찰스 디킨즈의 작품 <올리버 트위스트>의 주인공처럼 나는 춥고 배가 고팠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그 주변에서 간단히 요기라도 하고 기념관을 방문할까 해도 주변에 눈에 띄고 들어갈 만한 음식점이 보이지 않는 중류층(?) 4,5층 아파트들만이 모여 있고, 거리도 거의 한산한 런던 중심부에서 약간 북쪽에 위치해 있었다.

 

런던 디킨즈 기념관
런던 디킨즈 기념관


디킨즈(1812~1870)라고 하면 해군 경리국의 소사로 지내던 아버지를 가졌고 열 살이 되자 구두약 공장에서 하루 1실링을 받으며 노동하여 12세에 겨우 사립학교에서 2년밖에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그의 가난을 알고 있는 나의 선입견을 접어두고라도 다우티 스트리트는 결코 부호들이 사는 곳 같지는 않다. 디킨즈하우스라는 문패만 붙어 있지 않으면 그 속에 영국 대문호의 유적들이 진열되어 있고, 연간 거의 5만 명의 방문객이 줄곧 드나드는 집 같지 않은 평범한 사가의 모양이다. 지하 1층, 지붕방을 빼고 나면 3층 집인데 내 눈짐작으로는 층당 25~30평쯤 되는 것 같다.

문패를 발견하기 전에 노동자 세 사람이 그 집 앞에서 무엇을 치우고 있기에 디킨즈 하우스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동양 여자가 왜 이런 데까지 왔느냐는 이상한 표정으로, “바로 이 집이에요. 저 줄을 당기세요. 그러면 문을 열어 줍니다. 조금 전에도 대여섯 사람이 들어갔어요"했다. 나도 줄을 당겼다. 상냥한 중년 부인이 문을 열어 주면서 어느 언어든지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이, "어느 나라 말을 읽을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한국어"라고 하고 싶었지만 없을 것 같아서 “불어나 영어”라고 했다. 그는 방에 들어가더니 불어로 설명된, 큰 나무주걱 비슷한 데 타이핑된 원고가 붙어 있는 설명대 하나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현관문을 들어가자 곧바로 맞은편에 전시장 샾이 있었고, 왼편에 큰 방 하나와 식당, 오른쪽에는 이층으로 가는 층층계가 있었다. 식당으로 사용했던 방에 흉상과 많은 사람들의 사진이 붙어 있고 방 한 가운데 유리 진열장 속에는 접시, 수저 몇 개, 편지 원고 같은 것이 놓여 있었다. 지하에는 이 작가의 작품들과 디킨즈 연구 서적들을 모아 소 도서관(小圖書館)을 이루었다. 한 뚱뚱한 여자가 정성스럽게 관리하고 있었다. 3층에 올라갔을 때 뒤창을 통해 보이는 조그만 마당이 있었는데, 이 작가가 글을 쓸 때 그것은 충분한 휴식과 명상의 공간이 되어 주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집은 그가 24살부터 2년 8개월밖에 살지 않았던 집이다. 그러나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집으로 기록된다. 그런데 그 집이 이미 남의 손에 넘어가 허름한 하숙집으로 쓰이고 있을 즈음, 디킨즈 펠로우쉽 (Dickens Fellowship)'의 16회 연차 회의에서 창시자인 B. W. Matz에 의해 이 집을 다시 사고 보수하여 기념관을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되었고, 이 의견은 호응을 얻어 마침내 1925년에 공식적으로 오픈되었다.

이 아파트는 작가가 그의 부인 캐서린 호거스 (Catherine Hogarth)와 결혼하여 산 최초의 집이었다. 3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체류 중에서 그 집은 디킨즈를 영국의 대 문호로서 명성을 확보시켰던 곳이며, 젊은 성공자의 가장 활발했던 사회생활 시절의 장소이기도 했다. 거기서 <피크 위크의 기록 (Pickwik Papers)>을 끝냈고, <올리버 트위스트>를 완성했으며, <니콜라스 니클비 (Nicholass Nickleby)><바나비 러지 (Barnaby Rudge)>의 원고를 착수했던 곳이다.

또 가정적으로는 두 딸 마미캐티가 태어났고, 아직도 신혼의 행복감이 무르익어 가고 있었던 때였으며, 여러 클럽에 가입되어 예술가, 신문인, 문학가와 접촉이 가장 활발했던 시절이 바로 이 집에서였다고 한다.

내가 '모닝 룸'에 붙어 있는 많은 사진들 중에서 17살에 요절했다는 그의 처제 메리 호거스를 찾아보느라고 정신을 빼고 있는 사이에 10명이 같은 방에 있었는데 어느새 그들은 다 가 버리고, 또 18명의 새로운 얼굴들이 들어와 있었다. 메리라는 인물은 디킨즈의 문학과 인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존 그레이브즈(John Greaves)가 쓴 책에 〈The dearest friend I ever had>라는 제목으로 한 장(章)이 나오는데, 거의 이 인물에 대한 얘기며 디킨즈의 부인과 처제를 다음과 같이 비교해 놓았다.

 

Charles Dickens Morning Room
Charles Dickens Morning Room


“특히 그의 언니 캐서린이 임신했을 때 우둔하고 무기력한 경향을 나타냈는가 하면 메리는 영리하고 민첩했다. 디킨즈는 그 여자에게 어떠한 칭찬을 퍼부어야 할지 몰랐다”

라고 씌어 있는데, 그렇게 좋아했던 메리를 바로 그 아파트 2층, 그녀의 침실에서 자기의 팔에 안긴 채 잃어야 하는 충격을 받아야 했다. 그렇게 그의 행복과 불행이 함께 있었던 이 다우티 스트리트 집에는 이제 주인은 아무도 없고 희고, 검고, 노란 나그네들만이 그의 생전의 사랑을, 그의 죽음을 호기심 있게 읽어 내느라고 정신이 없다.


1837년 어느 토요일 저녁, 그의 작품 <빌리지 코케트>가 오페레타로 성(聖) 잼스 극장에서 공연되던 날, 구경을 하고 부인과 처제와 디킨즈 모두는 마음이 설레었고 기분이 좋아서 귀가했는데, 2층에 자러 올라간 처제의 깊은 신음 소리가 들려 뛰어갔고, 의사를 부르는 소동으로 밤을 지새웠으나 다음날 일요일 오후 3시(5월 7일)에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죽음은 젊은 디킨즈에게 큰 충격으로 남았으며, 그중 작중 인물 (Nell)의 죽음에서 환기된다. 디킨즈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 집을 중심으로 모이고 그의 문학과 인생과 사업 이야기를 한다. 펄벅은 자신이 문학을 하게 된 동기가 디킨즈의 영향이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나는 <Dickens at Doughty Street> <올리버 트위스트> 두 권을 그곳 가게에서 샀다.

그가 쓰던 가구들이 꽤 모아졌던 위층 방들이 마음에 들었다. 시간만 있었으면 그의 생가 브런디스턴과 출생지로 되어 있는 영국 남쪽 포츠머드 항구, 그가 옮겨 살았던 집과 산장, 런던 웨스트 민스터 사원의 묘지까지도 고루고루 가 보고 싶었으나 그의 원숙기에 쓴 자서전적 장편 걸작 <데이비드 카퍼필드>(1849~50)를 읽은 다음에 다시 와야겠다고 마음먹고 아쉬움을 느끼며 돌아왔다.

우리나라에는 유명 소설가나 시인의 생가 또는 기념관이 잘 보존되어 있지 않고 소홀한 것은 아닌가 싶었다. 이런 것에 대한 관심은 바로 국민의 문화 수준이므로  우리도 힘을 모으고 눈을 돌려 이런 사업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디킨즈와 그의 두딸
디킨즈와 그의 두딸 마미와 캐티

 

Dining Room
Dining Ro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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