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지오노의 집, 마노스크 / 프랑스
20세기 프랑스에서 가장 중요한 소설가 중의 한 사람인 장 지오노 ( Jean Giono,1895~1970)가 우리나라에 거의 소개되어 있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 그는 20여 권의 소설류를 비롯하여 에세이, 희곡, 번역, 산문 전반에 걸쳐 손대지 않은 분야가 없으며, 특유의 개성을 가진 실속 있는 다작으로도 유명하다. 그 많은 소설 거의 대부분에 아름다운 프로방스 풍경이 들어 있지 않은 것이 없다.
특히 지오노가 태어나고 죽은 그의 마을 마노스크 (Manosque)는 알프스 남쪽 발, 뤼베롱 아래 누운 작은 야산 들과 뒤랑스 강을 끼고 있다. 불과 인구 2만여 명이 사는 자그마한 마을이 그의 최초의 성공작 <언덕(Colline)>의 출판과 더불어 온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마노스크가 지오노의 마을임은 프랑스의 삼척동자도 다 안다. 그는 평생 동안 자기 동네의 산을, 물을, 바람을, 태양을, 짐승을, 꽃들을, 산골 친구들을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아마 지오노만큼 자기가 태어난 땅을 떠나지 않고 일생 동안 사랑한 작가도 드물 것이다.
지오노의 아버지
그는 북쪽 혈통인 할머니와 이탈리아계인 할아버지, 구두 수선방을 가진 아버지와 세탁소를 하는 어머니 밑에서 평화롭게 잘 자랐다. 이 마을 주민들의 생업은 올리브, 과일, 송로버섯, 아탄... 등의 생산에 종사하는 것이다. 요즈음은 프랑스의 가장 중요한 핵무기 연구소가 마노스크에서 가까운(약 10킬로미터 남쪽) 까다라슈(Cadarache)에 생겨, 거기에 종사하는 많은 엔지니어와 가족들이 그곳에 살고 있다.
지오노가 태어났다는 쌍 농 골목 14번지는 마노스크 주변에 펼쳐진 야산들과 더불어 그야말로 시적(詩的)인 장소다. 바로 이곳이 어머니의 세탁물을 어린 지오노가 손 바쁜 마을 부인들에게 배달하고 돌아오던 길목이다. 그리고 그렇게 존경하던 그의 아버지의 일터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비록 남의 구두를 꿰매어 주던 가난한 아버지였으나, "친구여, 우리는 노동자요 농부인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나 우리에게는 힘센 주먹이 있다. 별들이 가시를 달고 밤송이처럼 땅에 떨어지려고 하니 우리 하늘의 밤나무를 흔들어 버립시다” 하는 구호로 분노에 차 모여 앉은 억압받은 자들의 아지트인 구두방에서, 야생 동물을 길들이며 다루는 사람처럼, 아버지는 항상 남의 상처와 분노를 가라앉히고 쓰다듬어 주는 간호원이 되었다고 한다.
또 어느 날 그의 아버지는 마르세이유에서 모차르트 연주회에 갔다가 충격적인 감동을 받고 모차르트의 고향인 잘츠부르크까지 수천리를 걸어서 갔다고 한다. 가는 도중에 목마르고 지치면 마을마다 쉬면서 남의 구두를 수선해 주고 여행비를 벌어 가면서 오스트리아까지 도착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런 예리한 감성과 기인적 기질이 아들에게 전수된 것 같다. 지오노에게 음악은 이미 하나의 생활로서 동화되어 이층 서재에는 언제나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화가에 대해서는 항상 약간의 질투심을 가졌다고 적혀 있다.
지오노의 거리
내가 처음 지오노 집을 방문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내가 다니던 대학에는 지오노를 연구하는 샤보와 비아르라는 유명한 두 교수님이 계셨고, 또 내가 등록하던 첫해에 박사 과정 세미나 교재로 지오노의 작품 <Jean le Bleu>를 쓰고 있었는데, 샤보 교수님의 강의 가 너무 진지했고, 강의 준비를 너무 열심히 해오셔서 나는 감탄하며 항상 그 강의에 들어가곤 했다. 그리고 나 나름대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때 나도 저런 정도로 연구하는 교수가 되어야지 하고 다짐했지만, 현재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부끄럽다.
내가 있던 엑스에서 마노스크까지는 자동차로 1시간 거리이다. 지오노의 마을 근처에서는 가장 문화적이고 교육적 관광 도시이며, 마르세이유 항구로 가는 길목이기에 엑스 시(市)는 지오노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엑스 시에는 지오노를 기념하여 그 이름이 붙은 거리가 있으며, 여름 바캉스 철에는 엑스 대학에서 지오노 유물 전시회가 열릴 정도이다. 지난여름 방학 때에도 나는 그 전시장에서 그의 고물 바이올린이 원고더미 옆에 놓여 있던 것과 목동처럼 양 떼들과 찍은 사진과 올리브를 따는 모습의 사진, 이런 것들을 본 기억이 있다.
엑스를 찾아오는 세계 문학도들에게 마노스크는 하나의 순례지처럼 되어 있고, '지오노 친구회(Association des amis de Giono)'라는 모임이 매년 6월에 있어서 관심 있는 문학도, 문화인들이 함께 모여 토론도 하고 회고도 하며 그의 문학을 이야기한다. 아직 산 증인들이 많이 있어서 이날을 빛낸다. 마노스크 마을 주변에는 몽 도르(Mont d'Or)니 꽁따두르(Contadour)니 하는 이름이 붙은 야산들이 있어서, 지오노의 작품을 한 권이라도 읽은 사람에게는 그의 작품 세계가 현실적으로 가까이 있음을 느끼게 한다
늦봄의 향기
처음 내가 지오노 집을 찾아갔을 때, 햇빛은 황금빛으로 쏟아지고 있었고, 바람은 키 큰 나뭇잎들 주변에 머물러 있었다. 주변 언덕에서 몰려오는 늦봄의 꽃향기는 행복한 시간처럼 발돋움하고 있었다. 동네 할머니가 가르쳐 준 대로 키 큰 나무들이 서 있는 좁은 외길을 따라 2~30미터 올라가고 있었는데, 내 등 뒤에서 빨간 스웨터를 입은 자그마한 여자가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틀림없이 지오노의 딸 실비, 아니면 아린느다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미 그의 두 딸의 얼굴을 나는 책 속에서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뾰족한 콧날, 턱, 눈매는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 그래서 자신 있게 "혹시 지오노 씨 댁에 가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네,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그때부터 내가 약간 외교적인 언어를 구사하기 시작한 것은 그 집 내부, 특히 대문호의 작업실과 가족들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지오노 집은 공개되지 않은, 그의 부인과 딸 하나가 살고 있는 사가(私家)다. 들어오라는 그들의 초대가 없으면 우리는 대문 밖에서 서성거리다가 돌아가야 할 판이다. 그래서 나는 한국에서 작품을 읽고 여기까지 찾아왔노라고 과장해서 말했더니 기꺼이 들어오라고 했다. 그리고 일일이 자상하게 설명을 해주며 바로 자기 아버지 생전에 쓰던 서재를 보여주지 않겠는가. 모두가 깨끗이 정리 정돈되어 있는 품이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의 방 같았다.
벽에 둘려 있는 서가에는 많은 책이 꽂혀 있었고, 서울에 있을 때 책에서 보았던 튀제(17세기 마르세이유 출신 조각가)의 조상이 그대로 책상 옆에 놓여 있었다. 지오노 부인께서 아직 살아계신다던데 작가의 생전 얘기라도 좀 들을 수 있을까 하고 물어봤더니,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내 청을 들어주었다. 지오노 부인은 키가 작고 연로하여 거동에 불편을 느끼는 것 같았고 별로 말이 없었다.
부인은 자기 남편의 문학적 생애의 가치를 세상 사람들만큼 모르는 것 같았다. 항상 옆에 있어 주던 남편, 복잡하고 시끄러운 일은 집안에 끌어들이지 않고 편안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데 손색없던 남편을 뒷바라지하고 사랑하는 일로 늙어 온 부인이었다. 내 얼굴에서 국적을 읽었는지 두꺼운 책 한 권을 끄집어내어 딸에게 건네주었다. 중국어 책이었다. "우리 아버지는 늙으시면서 중국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중국어를 혼자 공부하셨어요" 라는 딸의 설명이다.

독학 챔피언
하기야 지오노는 독학의 챔피언이다. 그는 16살까지만 학교 공부를 했고, 그때부터 푼푼이 돈을 모아 산 책으로 혼자 공부하기 시작했다. 바깔로레아(대학 입학 학력고사) 시험 전날, 그는 학업을 중단하기로 결심하고 항상 어렵게 살림을 꾸려 가는 아버지를 도우려고 마노스크 은행 말단 직원으로 취직했다. 대단한 효자였던 모양이다. 얼마 가지 않아 그것도 포기하고 글 쓰는 일에만 전심 전력했고, 무슨 일이 있어도 오전 시간만은 가운을 걸치고 책상에서 글을 썼다고 한다. 자기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도 오전 중에는 서재에서 글을 썼다고 했다. 글을 쓰는 시간은 그에게는 행복의 시간이다. 단지 지병인 류머티즘 때문에 좀 시달린 모양이다.
그의 생애 75년 동 안 병역 관계, 이탈리아 여행, 빠리로 콩쿠르 상 타러 가던 일... 이런 날들을 모두 합쳐도 고향 집을 떠나 본 것은 불과 3년이 못 된다고 하니 73년을 그 고장에서 글만 쓰고 살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소설 세계에는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오리지널 한 세계가 존재한다. 그는 20세기의 가장 서정적인, 거의 시적(詩的)인 소설을 썼다. 참 재미있는 것은 자기는 자기 마을을 떠나지 않으면서 소설 속의 작중 인물은 거의 언제나 떠나도록 만들어 놓았다는 점이다. 이것은 무슨 심리일까?
별로 넓지 않은 정원에 조상이 두어 개 서 있었다. 나는 여러 가지 를 설명해 준 딸 실비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고 한국에 돌아가면 대학에서 지오노를 강의하겠다고 약속을 해 놓고 나왔다. 그렇게 유명한 작가의 주변 분위기치고는 그의 집은 열기나 과장도 없이 너무 가라앉아 있었다. 보통 사람의 것과 다름없는 일상의 순수한 표정들은 살아생전에 바다를 싫어했고, 전쟁을 증오하였으며, 빠리를 싫어한, 고양이를 싫어한 작가의 표상 같았다.
옮겨 온 빠리
첫 작품 <언덕>이 1929년에 빠리에서 성공을 거두자, 어느 날 갑자 기 그 산골까지 유럽 각처에서 100여 명이나 되는 예술가, 지식인 보헤미언들이 밀어닥쳤는데, 그는 한 사람도 집안에 들여놓지 않은 채 가족들과 의논하여 방뚜, 리베롱, 뤼라 산맥들이 보이며, 집은 침묵 속에 질펀하게 엎드려 있는 집 근처 꽁따두루 산언덕으로 방문객들을 데리고 나갔다고 한다.
추종자가 양 떼처럼 몰려들었던 이스라엘 백성의 추대자 모세를 방불케 했다고 한다. 빠리의 '동'이나 '로똥드' 같은 까페에서 정치, 시, 미학을 논쟁하던 그들의 논쟁 장소가 꽁따두루 산으로 옮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화가 베르나르 뷔페 (Bernard Buffet)와 소설가 앙드레 지드(Andre Gide)와는 교분이 있었다. 지오노의 단순한 산골 생활이 낳은 일화도 많지만, 그의 아름답고 풍부한 상상력과 세련된 문장을 대하고 있으면 마노스크 산에 흐르는 생수(生水)를 마시는 기분이다.





'유럽'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그리스 아테네에서... ( 2 ) (12) | 2025.06.10 |
|---|---|
| 그리스 아테네에서... ( 1 ) (2) | 2025.05.27 |
| 런던 디킨즈 기념관, 영국 (2) | 2025.04.18 |
| 슈투트가르트의 다임러 벤츠 박물관, 독일 (0) | 2025.04.04 |
| 남프랑스 <고르드>의 양치기 집 (0) | 2025.03.2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