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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에세이

산의 몽상

by 이 다인 2025. 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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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의 몽상 (夢想)

 

아침마다 커튼을 걷고 창밖을 바라본다. 내 방 창으로 펼쳐지는 짙어가는 여름 산의 녹음(綠陰). 그 풍경은 어느새 내 하루의 시작이 되었다. 어떤 날은 식탁에서 아침을 먹다 말고, 반쯤 남은 커피잔을 들고 창가로 가 산을 바라보며 그 시간을 마무리한다. '바라본다'기 보다는, 산과 은밀한 대화를 나눈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서울은 남산이 있고, 한강이 출렁이며 흐르는 도시. 지형이 아름다워 늘 좋은 도시라고 생각해 왔다. 수도를 정할 때 자연 풍수 조건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 조상들이 어련히 고려했을까. 나는 서울에서 오랜 시간 살았고, 청춘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래서 서울은 내게 단순한 도시가 아니라 삶의 한 부분이다. 특히 남산을 좋아했는데, 가끔은 그 길을 걸었고, 더 자주 멀리서 그 산을 바라보곤 했다. 남산은 멀리서 볼 때 더 아름다웠다.

 

부산에서도 한동안 살았다. 산천과 기후는 전국 어느 도시보다도 탁월하다. 그러나 도시 구조는 다소 아쉽다. 길게 늘어진 도시 구조와 교통의 불편, 아름답지 않은 건축물들, 정돈되지 않은 풍경은 종종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하느님의 걸작과 인간의 졸작이 억지로 맞붙은 듯한 느낌이랄까.

 

지방 근무를 하던 시절, 거주지를 결정하기까지 고민이 많았다. 바다를 유난히 좋아하는 나는 당연히 해변 근처에 살고 싶었다. 그래서 이곳저곳을 다녀보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바다와 내 마음은 멀어져 갔다. 아마도 화려함 뒤의 소란함 때문이었을까.

 

내 마음속의 바다는 싱그러운 처녀 같고, 산은 깊고 고결하여 쉽게 다가설 수 없는 존재였다. 그 도시는 바다와 산이 함께 어우러진 곳이지만, 어떤 해변은 너무 조야 (粗野) 했고, 어떤 곳은 미국 식민지 문화촌처럼 어설펐다. 결국 나는 산이 보이는 곳에 거처를 정했다. 아이들과 어머니가 그리울 때, 서울 친구들이 생각날 때, 나는 산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산은 내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10층으로 조망하기엔 최적이다. 나에게 산은 늘 멀리서 바라보는 대상이었다. 해맑은 봄날, 멀리 보이는 능선들은 수채화 같다. 하늘엔 강렬한 태양이 떠 있어도, 능선은 연회색이나 보랏빛으로 빛나며 시시각각 변한다. 그 풍경은 내 과거의 조각들이 모여 만들어낸, 화려하고 엷은 환상의 면사포 같다. 안개나 구름이 능선을 덮고 스며들며 생기는 흐름은 그야말로 바라보는 이의 특권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그 묘미를 즐겨왔다.

 

선비들이 산을 관조하며 깨달음을 얻었다지만, 나에겐 그저 눈이 즐거운 습관에서 비롯된 기쁨일 뿐이다. 산은 다양한 빛을 품은 능선만큼이나 몸태도 중요하다. 어떤 산은 부모처럼 포근하고, 어떤 산은 스승처럼 위엄이 있으며, 또 어떤 산은 사랑에 빠질 만큼 매혹적이다.

 

나는 산을 많이 그려보았다. 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삶의 모든 순간들이 떠오른다. 때로는 선명하게, 때로는 손에 닿지 않는 꿈처럼 아련하게. 시간은 출렁이는 강물이 되어 귀를 울리고, 일상에서 나를 해방시킨다. 마음속에 날개가 돋아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듯한 기분. 그 비상감은 참으로 소중하다.

 

산을 마주하는 이 기쁨이여. 산을 바라보는 감미로움이여. 산이여. 저 먼 해안의 물소리가 아직도 내 마음속에 울리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물론 산을 오르는 기쁨도 크겠지만, 이렇게 바라보는 일의 감동도 결코 작지 않다. 비 오는 날, 안갯속에 숨은 산이 건네는 조용한 메시지에 귀를 기울인다. 가까이할 수 없기에 더욱 우아한, 그렇게 계절마다 새로운 얼굴로 다가오는 산의 자태는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아름다움이다.

 

나는 이렇게, 멀리서 산을 사랑한다. 아직은 산에 들어갈 용기가 없다. 산에 속해버리면, 매일같이 이 멀리서 바라보는 감동을 잃을까 봐 두렵다. 인간관계도 어쩌면 마찬가지다. 바라볼 때 좋은 사람이 있고, 함께 살아야 좋은 사람이 따로 있는 법이다.

 

산은 본디 상징이 풍부한 존재다. 높고 중심에 있다는 이유로 많은 문화에서 산은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매개체로 여겨져 왔다. 우주의 수직과 수평을 잇는 축,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신성한 장소. 구약성서의 산,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회교의 카프(Kaf), 백두산의 환웅 전설, 파리 몽마르트르의 사크레쾨르까지... 이 모두는 산의 의미를 말해준다.

 

산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서 중심을 상징한다. 프랑스어에서는 산을 여성형 "La montagne"와 남성형 "Le mont" 두 가지로 표현한다. 그 차이는 모르겠지만, 일반적으로 산은 남성의 속성을 떠올리게 한다. 안정감, 고요함, 높이, 과묵함, 거대함 같은 것들 말이다. 만약 산이 남성의 상징이라면, 내가 산을 바라보며 느끼는 감정이 누군가에겐 뜻밖의 해석을 불러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그조차도 자연스러운 일일지 모른다.

 


 

산의 몽상
산의 몽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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