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고 싶은 얼굴들
어느 해 추석 연휴 때이었던 것 같다. 목금토일 나흘이 계속되는 그야말로 보너스 같은 황금 주말을 어떻게 쓸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나는 한가한 마음으로 신문 잡지를 집어 들고 극장 프로그램을 전부 봐 두었다. 보통 때는 영화관에 갈 시간이 없어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피곤하고 쉬고 싶어서 주말에는 조용히 지내는 편이다
옛날 어릴 때 시골 사람들이 추석명절에 영화관에 몰려가던 것을 생각하고 갑자기 나도 그것을 다시 해보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그래서 추석날부터 계속해서 영화와 연극을 합해 모두 4편을 보았다. 정말 오랜만에 극장에 간 셈인데, 영화관 분위기는 다소 만족스럽지 못했으나 소극장 관객들은 그런대로 꽤 수준이 있는 느낌을 받았다.
그때 본 것은 <백야(白夜)>라는 외국 영화와 시몬 보봐르의 <위기의 여자)라는 연극, 그리고 <내시>, <황진이> 등 2편의 방화였는데, 내 안목으로 연극 영화를 거창하게 비평하고 예술성을 운운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단지 내가 본 작품 4편이 우연히도 모두 공통적인 테마를 다루고 있었던 것이 흥미로왔다.
<백야>는 구 소련에서 망명한 유명한 무용수가 여행 중 비행기 사고로 다시 구 소련땅에 비상 착륙하여 감금 상태의 생활을 계속하던 중 또다시 자유 세계로 탈출하는 이야기이고, <위기의 여자>는 소설을 각색한 연극이었는데 프랑스 정상 가정에서 딸 둘을 잘 길러냈고, 남편의 뒷바라지를 잘해 내었던 모범 중년 주부가 남편이 변호사라는 자유로운 한 직업여성에게 눈을 돌리게 되자 충격과 분노로 회의와 좌절에 부닥치는 한 현대 여성의 내적 갈등을 그린 작품이었다. <내시>와 <황진이>는 한국인이면 누구나 그 줄거리를 알고 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를 굳이 두 종류로 나눈다면 <백야>와 <내시>는 인간 해방의 문제를 다루었다고 한다면, <위기의 여자>와 <황진이>는 여성 해방 문제를 들고 나왔다고 할 수 있다. 해방이니 자유니 하는 말들은 인간의 역사가 시작될 때부터 현재까지 항상 문제 되고 있지만, 그것은 영원히 미해결 문제로 남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욕망이 끝이 없는 것처럼 해방과 자유도 끝이 없는 것이며, 인간은 항상 그것을 위해서 투쟁하는 역사를 조금씩 만들어 갈 뿐이기 때문이다.
누르는 자와 눌리는 자, 수탈하는 자와 수탈당하는 자의 간격을 좁혀가는 것이 우리의 노력이고 나의 노력이어야 할 것 같다. 해방과 자유는 끝장이 나지 않는 것이라고 포기하고, 뒤로 미루고 물러서게 되면 그 순간부터 걷잡을 수 없는 심각한 문제를 대두시키는 것이 해방과 자유의 속성이다. 마치 시지프가 다시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산정(山頂)까지 돌을 운반하는 것을 중단할 수 없었던 운명 같은 것이 자유와 인간의 관계이리라. 나는 살면서 부당하게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는 불쌍하고 외로운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특히 여자들의 경우가 더 슬프고 더 많았다.
나에게는 16세에 시집와서 첫날밤부터 소박맞고 평생을 혼자 살다 돌아가신 가까운 친척 한 분이 계셨다. 양가의 딸에, 외모도 출중했고 훌륭한 음식. 바느질 솜씨에 부지런하며 마음씨도 고와서 소박맞을 이유가 전혀 없을 것 같은데, 왜 그 남편은 싫다고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이 내가 자라면서 풀리지 않았던 의문이었는데, 어느 날 드디어 어른들의 입을 통해 그 이유가 밝혀졌을 때 현대 교육을 받고 논리와 합리를 익힌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유인즉, 시골 농가였던 신부 댁에 신랑이 장가들던 날, 건넌방을 말끔히 치우고 도배를 새로 하여 젊은 남녀의 첫날밤 침실로 제공했다는 것이다. 신부가 족두리를 쓰고 앉아 불 밝히고 기다리던 그 방에 신랑이 들어서자마자 이상한 냄새를 맡고 싫다고 하면서 그 방을 나가 버렸고, 이 젊은 신랑은 그 냄새가 신부의 체취라고 믿고 우기면서 영원히 그 여인 근처에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젊은 신부는 평생을 기다리며 살다가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 비극의 원인은 신부가 아니라 그 방이었다는 사실이 20년 후에 철이 든 신랑의 고백을 통해서 밝혀졌다는 것이다. 바로 그 문제의 방은 첫날밤으로 사용하기 전에 오랫동안 누에고치를 먹이던 방이었기 때문에 누에 냄새가 지독하게 배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고 억울한 일인가.
나는 그 얘기를 듣고 너무 기가 막혀 누구를 탓하기 전에 무지하다는 것이 때로는 얼마나 엄청난 죄악인가를 실감했다. 남자가 둘째 부인을 얻는 것이 흉이 아니었던 시대여서 그 신랑은 새 부인을 얻어 행복하게 살다 가셨고, 이 여인은 시집과 친정 주변을 돌며, 그리고 우리 집에서 허드레 일들을 맡으면서 한평생을 마치셨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비단 한두 건이 아닌 것이 우리들의 어머니와 할머니들의 사회였다.
너무 가슴 아픈 충격이어서 나는 잠잠히 듣고 있었지만 어른들의 무지함과 비인간적인 태도에 울분을 참지 못했다. 이와 같이 부당한 일생을 여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감수했어야 했던 고인을 생각하면 서, 나는 아직도 사회에서나 직장에서 무지하고, 이유 없이 남자라는 것만으로 우월하다고 믿고 허세나 횡포를 부리는 사람을 보면 한심 하다는 생각이 든다. 경멸을 한다.
과거에는 한 남성과 결혼하여 실패하면 한 여성으로서의 행복은 물론 한 인간으로서의 행복도 가차 없이 실패로 돌아갔지만, 현대는 한 여성으로 불행했어도 한 인간으로서는 개인의 노력과 능력에 따라 행복해질 수도 불행해질 수도 있는 것이 과거와 다른 점이다. 그만큼 여성에게도 열린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가끔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인간으로서 자기실현을 하고 여성으로서 자기완성'을 해 나가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인식하고 있는 여성들의 자세가 이제 강하게 요구되는 시대가 되었다. 4편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인간이고 싶은 '내시'의 절규와 인간이고 싶은 '황진이'와 '러시아 무용가'의 얼굴들이 오늘따라 이번 추석 보름달만큼이나 둥글게 확대되어 나의 마음에 강한 의미로 와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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